“역에서 저처럼 기차를 좋아하는 어린 친구들을 만날 때면 어릴 적 제 생각이 나서 추억에 잠기곤 합니다. 가끔은 그런 친구들이 자라서 동료 기관사가 되고, 같이 술 한 잔 기울이곤 했던 그 시간이 제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순간으로 남아있습니다.”
철도의 날(6월 28일)을 맞아 만난 류기운 코레일 KTX 기장은 철도를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철덕(철도 덕후)의 시조새’라고 불린다. 어릴 적부터 기차를 사랑해 철길을 따라다니던 그는 1992년 부기관사로 철도인의 길을 걷기 시작해 어느덧 33년 차 기관사가 됐다. 올해 160만km 무사고 운행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일할 때뿐 아니라 쉬는 날에도 철도 사진을 찍고 모형을 수집하며, 철도에 대한 애정을 온라인 공간에 꾸준히 공유하고 있다.
류 기장은 “부천에 살던 어린 시절, 집 앞을 다니는 전철을 수시로 구경했다”며 “한 번씩 영등포역을 찾아 디젤 열차와 특급열차를 구경하던 기억이 사진처럼 머릿속에 남아 ‘기관사가 되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과 당시 철도청 공무원 시험에 동시에 합격한 류 기장은 고민 끝에 대학 진학을 미루고 철도인의 길을 택했다. 어린 나이에 택한 직업인 만큼, 흔들릴 뻔한 적도 있었지만, 한국에서 ‘꿈의 열차’라고 불리던 고속열차 도입이 본격화되면서 기관사의 길을 포기하지 않게 됐다.
그는 “처음에는 일하면서 일반대학 정보통신학과 학생 생활을 병행했는데, 이 때문에 잠시 정보기술(IT)업계에 갈 뻔했다”며 “그러나 군대까지 다녀오고 1990년대 말 고속열차 도입이 추진되며 그 열차를 꼭 몰아보고 싶다는 생각에 기관사의 길을 계속 걷게 됐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 꿈에 그리던 고속열차가 들어온다는데 차마 포기할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30년 넘게 기차를 몰아온 류 기장이지만, 지금도 KTX를 운전할 때는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그는 “열차 운전은 거의 100% 수동이라고 보면 된다”며 “일부 자동화가 이뤄졌지만, 잔고장과 변수들이 많아 사람 손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어 “매번 같은 길을 달리는 것 같아도 예기치 못하는 상황은 늘 생긴다”며 “기장은 정시 운행을 하기 위해 열차 속도와 정차 위치를 세밀하게 조정하는 등 엄청난 부담을 짊어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은퇴 전까지 안전 운행을 이어가 2029년께 200만㎞ 무사고 운전을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철도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은 운전석에만 머물지 않는다. 블로그엔 그가 찍은 풍경 사진과 철도 이야기가 가득하고, 최근엔 유튜브 활동도 시작했다. 류 기장이 요즘 가장 좋아하는 풍경은 평택 구간에서 펼쳐진다. 그는 “평택 인근에 평야가 쫙 펼쳐져서 논에 물이 찰 때는 마치 바다 가운데를 달리는 것 같다”며 “그 풍경을 꼭 찍고 싶어 쉬는 날이면 카메라를 들고 나간다”고 했다.
인공지능(AI)과 로봇 등 기술 발전으로 언젠가 기관사라는 직업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오지만, 그는 “당장 오늘 일이 있다면 마지막까지는 내 몫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류 기장은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기보다, 하루를 집중해 끝까지 마무리하다 보니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다”며 “그리고 언젠가 나보다 철도 운전을 잘하는 사람이나 기술이 등장한다면, 고객의 안전을 위해 기꺼이 자리를 맡길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소현 기자 alp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