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마이클 크라이튼의 소설을 읽고 동명의 영화 ‘쥐라기 공원’(Jurassic Park)을 내놓은 것이 1993년이다. 이후 후속작이 이어져 지난달엔 일곱 번째 작품이 국내에서 개봉됐다. 4편부터는 시리즈 제목이 ‘쥐라기 월드’(Jurassic World)로 바뀌었다. 확장된 공간만큼이나 더 커진 인간의 탐욕을 얘기하고 싶었던 걸까.
영화엔 다양한 공룡이 등장하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공동 주연급인 티라노사우루스 렉스(티렉스)와 벨로시랩터다. 그런데 최강의 포식자인 티렉스보다 오히려 집요하고 영리한 사냥꾼인 랩터가 등장인물들을 쫓는 장면이 더 손에 땀을 쥐게 한다. 티렉스의 눈길은 어쩌면 피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집단 사냥을 하는 랩터를 벗어나기는 쉽지 않아 보여서다.
일본과의 관세 협상을 타결한 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이 CNBC와의 인터뷰 중 한국을 거론한 데서 랩터를 떠올린 것은 그 디테일에 놀라서다. “일본과의 합의를 보고 한국은 욕설(expletives)이 터져 나왔을 것”이라고 한 대목이다. 일본의 협상 결과가 라이벌 한국에 어떤 압박으로 작용할지 정확하게 알고 있고, 그걸 십분 활용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트럼프 앞에서 최종안을 심사받는 아카자와 료세이 일본 경제재생상의 모습은 랩터들에 둘러싸여 티렉스를 마주한 사냥감처럼 보였다. 트럼프가 “버릇없다”고 분노할 정도로 완강히 버틴 일본은 허망하게 물러섰고 5500억달러의 대미 투자 카드로 관세율 15%를 얻었다.
자존심이 센 유럽연합(EU) 역시 금세 꼬리를 내리고 일본 뒤를 따랐다. 이미 이 상황에서 한국에 선택의 여지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상호관세 15%와 자동차 품목관세 15%가 얻을 수 있는 최대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감안해 자동차 관세율 12.5%를 원했지만, 트럼프 팀의 성향상 애초 불가능한 목표였다. 시한 내 타결을 위해 우리 대표단은 러트닉의 동선을 쫓아 스코틀랜드까지 날아가야 했다. 결국 한국도 3500억달러 투자와 1000억달러어치 미국산 에너지 구매로 일본, EU와 같은 출발선에는 서게 됐다. 협상 타결 후 백악관에서 트럼프와 나란히 서 ‘엄지척’을 하는 우리 대표단의 표정도 아카자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안보를 미국에 의지해 온 동맹국부터 줄줄이 코가 뀄다. 한국, 일본, EU 합쳐 미국에 1조5000억달러(약 2083조원)라는 천문학적인 투자를 약속하고도 관세율 15%에 안도하고 감사해야 할 처지가 됐다. 사실상 트럼프의 완승이자 ‘트럼프 월드’의 완성이다. 누가 트럼프는 늘 겁먹고 물러선다며 ‘타코(TACO)’라고 비웃었는지 모를 일이다. 트럼프 1기가 ‘공원’이라면 2기는 ‘월드’로 진화했다. 그 결정적인 차이는 트럼프를 보필하는 참모가 가신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1기 때 점잔을 빼던 ‘어른’ 참모들과 달리 2기의 가신들은 주군을 위해 동맹을 궁지에 몰아넣고 최대치의 양보를 얻어내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주군 트럼프를 향한 아부에도 능하지만, 전략 수립부터 실행까지 이어지는 연계 플레이도 발군이다.
이제 약육강식과 각자도생의 트럼프 월드에 던져진 것은 우리 기업들이다. 관세율 15%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경영 효율화를 하지 않고는 미국 시장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능력치를 훌쩍 넘은 대미 투자도 부담이다. 하지만 고난 극복의 DNA가 체화된 우리 기업들이다. 이번 위기도 이겨내고 그 속에서 성장의 기회까지 찾아낼 것이라고 믿는다. 다만 위협적인 존재가 트럼프와 그 가신들만은 아니라는 점이 문제다. 기업들이 정작 더 두려워하는 건 등 뒤에서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국내의 ‘반(反)기업 괴수들’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