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지난 1월 출범한 직후 일방적으로 시작한 관세 전쟁으로 전 세계가 비상이다. 미국 주도로 1947년 출범한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와 이를 이어받아 1995년 확대 개편된 WTO(세계무역기구)의 보편적 자유무역 질서는 불과 몇 개월 사이 설 자리를 잃었다. 적어도 최대 시장인 미국과의 무역에서는 그렇다. 미국은 한국을 비롯한 캐나다, 멕시코 등과의 기존 자유무역협정(FTA)은 상호관세 합의 후 새 무역협정으로 대체하겠다는 구상을 밝힌 상태다.
트럼프의 일방통행식 관세 전쟁은 알려진 대로 미국 내 철강, 조선, 반도체 등 제조업 부활 정책과 맞닿아 있다. 관세 정책을 설계한 스티븐 마이런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이 쓴 이른바 ‘마이런 보고서’에 나와 있는 내용 그대로다. 트럼프 2기 출범 6개월이 지난 지금 다시 보면 깜짝 놀랄 만큼 현재의 정책 궤적과 닮았다. 단순히 무역 적자를 줄이고 관세 수입을 늘리는 차원을 넘어선다.
보고서는 기축통화인 달러화의 구조적 강세로 인해 금융산업과 부유층은 이득을 보지만 수출 경쟁력이 추락하면서 제조업이 쇠퇴했다고 진단한다. 그 결과 제조업 일자리가 줄고 지역 경제가 붕괴하면서 노동자들이 정부 지원금에 의존하거나 경제적 어려움에 부닥친 것으로 분석했다. 관세 정책은 제조업 부활을 견인해 일자리를 늘리고 양극화를 줄이는 최적의 수단으로 제시됐다. 거시 경제와 금융 시장이 받을 충격에 대한 우려는 과장됐으며, 이는 트럼프 1기 때 중국과의 관세 전쟁에서 검증된 사실이라고 설명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과거 “철강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는 말을 했다. 강력한 제조업 기반이 없으면 국가 경제도, 안보도 보장할 수 없다는 의미다. 트럼프 정부의 방향은 일본 및 유럽연합(EU)과의 관세 협상에서도 나타난다. 일본은 5500억달러 대미 투자를 약속했다. 반도체, 의약품, 인공지능(AI) 등 미국이 지정하는 분야에 투자한다는 게 골자다. EU 역시 미국 직접투자에 6000억달러를 쓰기로 했다. 한국도 대규모 투자를 약속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도요타 TSMC 등 글로벌 기업은 기업대로 투자에 나서고 있다. 해외 기업과 자본이 미국 제조업 회생의 선봉에 서게 된 모습이다.
한국도 제조업이 위기다. 지난 50년간 국가 경제 성장을 견인해온 제조업이 중국의 거센 공세에 고전하고 있다. 많은 제조 대기업의 역동성이 예전만 못하다. 투자가 그렇고 일자리 창출도 마찬가지다. 조선과 방산 등을 빼면 기존 제조업 대부분은 기술과 사업 혁신의 성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저성장 기조 역시 이런 흐름과 무관치 않다.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얼마 전 한국 제조업을 두고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했다.
제조업 위기를 대하는 한국과 미국의 대응은 확연히 다르다. ‘월스트리트의 나라’ 미국은 제조업 부활을 얘기하지만 ‘산업의 나라’ 한국은 기업 거버넌스 개혁 이슈로 뜨겁다. 상법 및 세법 개정과 맞물려 집중투표제 의무화, 감사위원 분리 선출 확대, 배당소득 분리과세, 대주주 양도소득세 기준 등을 놓고 정부·여당과 증시 투자자들이 갑론을박을 거듭하고 있다. 코스피 5000 슬로건에 따라 투자자 관점에서 기업 성장이 아니라 기업 이익을 어떻게 나눠 가질 것인지에 초점을 맞춘 논쟁이다. 초강력 관세 정책을 동원한 미국 제조업 부활과 일자리 늘리기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예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글로벌 경쟁에 허덕이는 기업이 성장동력 확보가 아니라 투자자 이익을 더 고민해야 한다면 ‘잃어버린 10년’은 더 길어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