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에 적성국 취급받던 파키스탄 전쟁 중재자 부상
종전 불발될 경우 막대한 피해 세계 각국에 전가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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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TV 제공]
(서울=연합뉴스) 한승호 선임기자 =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인 헨리 키신저는 1971년 7월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를 방문하던 중 비밀리에 중국 베이징으로 날아갔다.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려는 닉슨 대통령의 밀명을 이행하기 위해서였다. 키신저의 비밀 방중은 파키스탄이 중국과의 긴밀한 외교 채널을 통해 적극적인 만남 주선과 의제 중재에 나선 덕분이었다. 이듬해 닉슨의 방중이 실현됐고 '세기의 이벤트' 미중 수교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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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DB]
엄혹한 냉전 시기 상상하기 어려운 미국과 중국의 외교관계 개선 모색 초기에 메신저 역할을 했던 파키스탄이 반세기가 지나 미국과 이란의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협상의 중재자로 등장해 '2주 휴전'이라는 극적인 합의를 이끌어냈다. 확전을 우려하던 세계는 셰바즈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의 휴전 발표에 일단 안도했다.
인구 2억명이 넘는 파키스탄은 핵무기를 갖고 있으나 경제와 치안이 취약한 국가이다. 1990년대 말 비공식 핵 보유국이 된 파키스탄은 핵기술을 이란과 북한 등에 넘긴 사실이 알려져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기도 했다. 이처럼 서방 국가들에 적성국으로 취급받았던 파키스탄이 어떻게 미국과 이란의 전쟁 중재자로 부상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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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꼽을 수 있는 자격은 전쟁 중인 미국·이란 모두와 원만한 관계 유지와 대화 채널을 갖고 있는 국가라는 점이다. 파키스탄은 전통적으로 미국의 안보 파트너였으며 아프간 전쟁 때도 적극 지원했다. 이와 동시에 이란과 국경을 맞댄 협력적 동반자 관계를 유지해 왔다.
중동의 정치적 역학 관계에서 핵심 요인인 종파 갈등에서도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파키스탄은 전체 인구의 97%를 무슬림이 차지할 정도의 세계 최대 이슬람 국가다. 그런데도 시아파 중심의 이란과 수니파 중심의 사우디아라비아 사이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기에 중재자로 나설 수 있었다.
파키스탄은 이란과 긴밀한 중국과 전략적 관계도 맺고 있다. 이번 전쟁을 둘러싸고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미국-이란-중국의 가교 역할이 가능했던 요인이다. 파키스탄이 이란에 중재안을 내놓자 중국도힘을 보탰다. 이란 원유의 최대 고객이라는 지위를 활용해 이란에 유연한 대응을 강력히 권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설정한 데드라인이 임박한 가운데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의 적극적인 중재가 주효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인한 유가 급등에 국가적 어려움이 가중되고, 경제적 절박감 속에서 수백만 노동자들이 외화벌이에 나선 걸프 국가의 안정이 자국에 유리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중재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이란도 그의 노력을 인정했다. 중동의 이해 당사국들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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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A·신화=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오는 11일(미국 동부 시간) 이슬라마바드에서 열릴 예정인 공식 협상 결과를 예단하기는 어렵다. 이란의 핵 개발 포기, 호르무즈 해협 개방과 통제권, 전쟁 피해 배상 등 난제들이 많기 때문이다. 양측의 '최대 요구'로 잔뜩 벌어진 거리가 얼마나 좁혀질지 지켜볼 일이다.
여전히 치열한 기 싸움을 벌이고 있는 미국과 이란이 파키스탄의 중재로 얻은 '종전 기회'를 붙잡을지, 아니면 내팽개칠지는 그들의 손에 달렸다. 종전이 불발될 경우 막대한 피해는 세계 각국에 전가될 수밖에 없다. 세계가 주목하는 외교 무대에 반세기 만에 다시 중재자로 나선 파키스탄의 '이슬라마바드 마법'이 과연 통할까?
hsh@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6년04월10일 07시07분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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