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컬] 광화문 현판 '한자 밑 한글' 적절한 대안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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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 유지' 원칙 벗어나고 한글 우월성 저해 소지도 있어

자금성 만주어 병기는 '정복자 표식'…참고 사례로 부적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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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현판

[연합뉴스DB]

(서울=연합뉴스) 한승호 선임기자 =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의 현판을 둘러싸고 다시 논란이 일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한자 현판 밑에 한글 현판을 추가하는 방안을 제안한 뒤 다양한 의견이 분출하고 있다.

국민 의견 수렴을 위해 문체부가 최근 개최한 토론회에서도 국가 상징 공간인 광화문에 한글 현판을 다는 것이 국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이자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찬성 의견과, 한글 현판 추가 자체가 원형을 훼손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라는 반대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논란의 중심에 있는 한글 현판은 광화문의 역사에 이미 등장했던 적이 있다. 광화문은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함께 파괴됐다가 고종 때 중건됐다. 지금의 경호실장격인 훈련대장과 왕실 건축·보수 총괄기관 수장을 겸임한 임태영이 한자로 쓴 광화문현판을 달았으나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글 전용 정책'에 맞춰 직접 쓴 한글 현판으로 대체했다.

이미지 확대 박정희 전 대통령 친필 광화문 한글 현판

박정희 전 대통령 친필 광화문 한글 현판

[연합뉴스DB]

이후 경복궁 복원 기준이 '고종 중건 당시'로 정해지면서 2010년에는 다시 한자 현판으로 교체됐다. 현재 현판은 2018년 새로운 사료가 나와 흰색 바탕에 검은색 한자에서 검은 바탕에 금색 한자로 다시 제작된 것이다. 최초 현판은 임진왜란 때 소실됐으며 고문헌에서도 원형에 대한 기록을 찾지 못하고 있다.

문화유산 가치 보존의 제1원칙이 원형 유지다. 현행 문화유산법 제3조(문화유산 보호의 기본원칙)에도 '문화유산의 보존·관리 및 활용은 원형 유지를 기본 원칙으로 한다'고 명시돼 있다.

온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던 2008년 숭례문 전소로 인한 복구 과정에서도 이 원칙은 지켜졌다. 전문가들의 자문과 철저한 고증을 통해 숭례문을 국보로 되살렸다. 불에 탄 현판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필체가 왜곡된 사실을 입증하는 탁본 자료를 찾아 일부를 원형대로 바로 잡기도 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광화문 현판을 한자와 한글 '1+1' 방식으로 바꾼다는 것은 문화재 보존 원칙에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국가 정체성을 살린다는 취지에도 부합하지 않는 측면이 많다.

이미지 확대 '광화문 현판을 한글로!'

'광화문 현판을 한글로!'

(서울=연합뉴스) 신준희 기자 = 1일 광화문 앞에서 광화문 훈민정음체 한글현판 국민모임 주최로 열린 '3.1절 맞이 광화문 훈민정음체 한글현판 설치 범국민 출범식'에서 예시현판 모형이 공개되고 있다. 2026.3.1 hama@yna.co.kr

현재 한자 현판을 그대로 두고 한글 현판을 하나 더 달 경우는 '한 건물 두 현판'이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원형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한자와 한글에 모두 익숙한 내국인에게는 중복이고, 그렇지 않은 외국인에게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한자 아래에 한글을 줄 세워 배치하는 것도 문제다. 한자를 번역한 '한글 안내'로 비칠 수 있고, 한자 밑에 있는 한글을 한자의 하위 문자로 오해하게 할 소지도 있다. 한글의 우수성 알리기와 멀어진다.

문체부는 중국 베이징에 있는 자금성 현판에 한자와 만주어가 함께 표기된 사례를 언급하기도 했다. 이는 한족 명나라를 지배한 만주족 청나라의 '정복 표식'이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자금성 현판은 당시 중국 황실의 공식 언어였던 만주어를 우선하고 피지배 한족의 언어인 한자를 옆에 병기한 방식이었다.

중국 베이징에 있는 천안문

중국 베이징에 있는 천안문

[연합뉴스DB]

자금성의 정문인 천안문은 명나라 영락제가 완성해 승천문으로 불렀다. 그런데 청나라가 화재로 불 탄 문을 복구하면서 천안문으로 바꾼 것을 비롯해 자금성 곳곳에 정복자의 의지를 투영하고 수많은 표식을 남겼다. 광화문 현판에 참고할 사례로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한자 현판을 내리고 한글 현판으로 바꾸는 것이 더 큰 상징적 의미가 있다. 하지만 수차례 교체 시도가 원형 보존 논리 앞에 번번이 좌절됐다. 그렇다고 '한자 밑에 한글' 방식은 우회로가 아니다.

문화유산 보존 원칙을 뛰어넘어 새로운 광화문을 만들기 위해서는 국민 다수의 공감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어정쩡한 절충안은 갈등만 키울 수 있다. 시대정신을 구현할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h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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