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조종엽]백성들 문화 담은 한글 현판, 광화문에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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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엽 문화부 차장

조종엽 문화부 차장
어떤 존재가 주체로 서는 건 비로소 제 이름을 쓸 때가 아닌가 한다.

지난달 31일 ‘광화문 한글 현판 추가 설치 토론회’를 지켜보던 기자의 머릿속엔 ‘황강아지, 김뭉치, 김바회, 손삭담이, 김슈벅이, 노막산…’ 같은 이름이 떠올랐다. 이들은 18세기 경남 진주의 마진마을 재령 이씨 집안 노비 또는 마을 백성들로, 2016년 발견된 한글 계(契) 문서에 등장한다. 노비나 ‘상놈’들도 양반에 예속하거나 억눌린 삶이 전부가 아니었으며 서로 돕는 그들만의 세계에서 주체로 살았다는 걸, 한글로 쓰인 그들의 이름은 생생히 증명한다.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뜻을 펴길’ 바랐던 세종의 바람과 한글문화를 꽃피우려는 뒷사람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대중이 중심이 되고, 지식과 정보의 민주화가 이만큼 이뤄졌을까.

“시류에 따라 문화유산을 변형해선 안 된다”는 한글 현판 설치 반대 측 주장에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 어려운 건 그래서다. 한글문화는 고작 ‘시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토론회에서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가 힘줘 말한 것처럼 우리 공동체 정체성의 핵심이다. 한글 창제에 담긴 애민 정신은 오늘날의 민주공화 이념으로 계승됐고, 한국어와 한글을 사용한다는 걸 빼놓고는 한국인을 정의하기 어렵다.

물론 굳이 광화문에 한글을 표현해야 하느냐는 건 또 다른 문제다. 한글 현판 설치를 촉구하는 측은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장소이기에 마침맞다지만, 새 현판이 문화유산의 외양을 일부 바꾸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옛사람들의 행위와 문화를 존중하자는 데 누가 토를 달까.

하지만 한글 현판이 “과거의 물질 증거를 조작하는 일”이란 주장은 너무 나갔다 싶다. 한자 ‘光化門’ 현판을 아예 내리자는 주장은 이미 철회됐고, 지금은 한글 현판을 추가로 설치할 것이냐가 쟁점이다. 한자로 이룩한 풍성한 전통문화를 부정하는 취지로 오해될 일이 아닐 것이다.

한글 현판 반대 측이 ‘일제의 장막을 걷어내고 조선의 상징인 궁궐을 드러낸’ 원형 복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건 납득이 가는 면이 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청사를 헐어 낸 것도 이제 30년이 지났다. “광화문이여! 너의 생명이 조석(朝夕)에 절박(切迫)하였다”는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의 절절한 호소(1922년 동아일보 기고 ‘장차 잃게 된 한 조선의 건축을 위하여’)는 역사의 영역이 됐다. 한글 현판을 내건다고 일제의 광화문 훼손 역사가 감춰지지도, 역사가 왜곡되지도 않는다. 문화유산을 민족의 수난 차원에서만 접근하는 건 지나간 시대의 정신에 가깝지 않나. 기자는 개발 논리가 문화유산의 원형을 훼손하는 일에 반대하지만 ‘문화유산은 자갈 하나 건들 수 없다’는 식의 ‘문화유산 근본주의’에도 회의적인 편이다. 과거의 유산으로서 광화문의 진화는 ‘1910년에 끝났다’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광화문은 한국인과 함께 살아 숨 쉬며, 미래로 이어질 존재다. 황강아지와 김뭉치, 김바회가 제 이름을 썼던 데서 뿌리를 두고 있는 민주공화국을 손삭담이와 김슈벅이, 노막산의 후손들이 기념하는 것. 600년에 걸쳐 차츰 현실이 된 대중사회의 이상을, ‘광화문’이라는 이름을 한글로 현판에 써서 기린다는 건 꽤 멋진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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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엽 문화부 차장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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