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5년 1월 1일 세배를 하러 온 정치인들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그때 김 전 대통령은 “무엇이 내가 나아갈 바른 길인가를 선비처럼 올곧게 따지는 서생적 문제의식이 필요하지만, 그것에만 매달리면 완고함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면서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지, 언제 물건을 구매하고 언제 팔지를 생각하는 상인들의 현실적 감각이 필요하다”고 했다. 정치권에선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의 강경파들을 겨냥했다는 해석이 나왔다. ‘개혁’이라는 문제의식에 집착하다 ‘현실’을 직시하는 상인 감각을 도외시해 개혁의 동력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지적했다는 분석이었다.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 감각’은 김 전 대통령을 대표하는 사상으로 회자되며 민주당 정치인들의 이념이자 지침이 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지층 반대를 무릅쓰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당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해찬 전 국무총리가 생전 “가치는 역사에서 배우고 방법은 현실에서 배우라”고 강조한 근거이기도 했다. 이재명 대통령도 국정 운영의 핵심 기조로 실용주의를 내세우며 서생 의식과 상인 감각을 인용한 바 있다. 열린우리당 강경파는 국가보안법 폐지와 사학법 개정 등 ‘4대 개혁’과 서생 의식에만 집착하며 상인 감각을 외면하다 정권을 야당에 넘겨줬다.
보수 정당도 보수적 서생 의식을 기반으로 진보적 의제까지 활용하는 상인 감각을 갖출 때 집권 기반을 마련했다. 국민의힘 전신 정당들은 자유민주주의·법치주의 수호의 문제의식을 다져 왔다. 상인 감각도 발휘해 전 국민 건강보험과 기초연금 같은 복지정책을 도입하고 정착시켰다. 연평균 최저임금 인상률도 문재인 정부(7.2%)보다 박근혜 정부(7.4%)가 높았다. 진보가 독점하던 의제를 상인 감각으로 선점해 현실화시킨 것이다. 탈냉전 시대가 도래하자 소련, 중국과 수교를 맺는 ‘북방 외교’로 경제 영토를 넓힌 것 역시 상인 감각을 발휘한 결과다.현재의 국민의힘은 서생 의식을 잃어가고 있다. 전 국민이 실시간으로 지켜본 12·3 비상계엄이 위헌·위법하다고 선뜻 말하지 않았고, 계엄 해제 요구안 표결엔 의원들이 대거 불참했다. 당원들이 민주적으로 선출한 대선 후보를 바꾸려다 실패하는가 하면, 당 대표가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법원의 무기징역 선고를 부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보수의 핵심 가치로 다져온 자유민주주의·법치주의 수호를 스스로 형해화하고 있는 것이다.
극단적 자유주의와 시장주의에만 몰두하다 보니 상인 감각도 증발하고 있다. 당을 대표하는 노동·복지 정책은 언제부턴가 자취를 감췄다. 윤석열 정부는 주 52시간제를 유연화하겠다며 69시간제를 떠보다 청년들의 분노가 일자 철회하기도 했다. 송언석 원내대표는 1일 당 노동위원회 회의에서 “시중에 마치 우리 국민의힘은 노동자 편을 들지 않는다고 하는 오해가 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오해를 불식시키고 싶다면 서생 의식과 상인 감각이 함께 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증명해야 한다. 궤멸로 치닫는 보수를 재건하는 첫걸음이기도 하다.
유성열 정치부 차장 ry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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