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속 노래는 비트나 멜로디 측면에서 기존 K팝의 특징을 잘 살렸다. 극 중 악마들조차 흥얼거리며 “중독성 있다”고 인정할 정도다. 가장 인기 있는 곡은 빌보드 싱글차트 4위를 기록한 ‘골든(Golden)’. 결점을 감추는 데 급급했던 주인공이 고음을 내지르며 ‘더 이상 두려움 속에 숨지 않겠다’고 노래하는 모습이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 왕국’의 ‘렛 잇 고(Let It Go)’를 연상시킨다. ‘골든’은 이 곡이 기록했던 빌보드 최고 순위(5위)를 이미 뛰어넘었다.
그런데 ‘골든’을 이처럼 매력적으로 느끼게 하는 또 다른 킬링 포인트는 의외의 곳에 있다. 바로 한 줄씩 감칠맛 나게 섞인 한국어 가사다. 이 작품은 K팝과 한국 문화를 소재로 하지만, 미국 제작진이 만든 미국 애니메이션이다. 당연히 모든 게 영어로 제작됐는데, 가사에서 갑자기 한 줄씩 한국어가 툭툭 나온다. “Up, up, up with our voices 영원히 깨질 수 없는 Gonna be, gonna be golden”식이다.
맥락상 그 대목에서 한국어가 나와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무심히 섞인 한국어 한 구절이 전체 곡과 신비스러운 조화를 이루며 입에 착 감긴다. 특히 한국인들이 이 대목에서 전율을 느끼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지금까지만 해도 한국 대중문화에서 영어가 ‘정확히 그런 효과’를 내기 위해 사용돼 왔기 때문이다.2010년대만 해도 국내에선 대중가요 가사에 쓰인 영어나 외래어의 영향, 효과나 문제점에 관한 대중문화 연구가 많았다. 이 무렵 발표된 한 연구에 따르면 대중가요 50% 이상이 영어를 섞어 썼다. 주로 곡 분위기 전환, 후크나 후렴구의 운율을 위해서였다.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메시지를 은어처럼 전달하는 용도로도 활용됐다.
요컨대, 대중가요 가사에서 영어는 대부분 차별화의 방편이었다. 더 그럴듯한 곡을 만들기 위해, 더 정통성 있어 보이기 위해 가사 곳곳에 때로는 무분별할 정도로 섞어 썼다. 문화사대주의나 우리말 파괴라는 지적이 심심찮게 나왔던 이유기도 하다. 그런데 이제 완전히 반대 상황이 온 것이다.
헌트릭스의 다른 히트곡 ‘하우 이츠 던(How It‘s Done)’이나 이들과 대결하는 저승사자 보이밴드인 사자보이스의 ‘소다 팝(Soda Pop)’ 등도 마찬가지다. “불을 비춰” “지금 당장 날 봐” 같은 한국어 구절이 K팝의 정통성과 힙함을 살려내는 장치로 쓰인다. 애니메이션 대사에선 “가자 가자” “후배” 같은 한국말을 그대로 쓰며 ‘찐’한국 느낌을 과시한다. 이쯤 되면 세계가 열광하는 ‘K콘텐츠다움’을 완성하는 마지막 터치는 한국어가 된 게 아닌가 싶다. 공고한 언어 패권마저 흔들 수 있는 문화의 힘이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박선희 문화부 차장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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