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직후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사회민주당 소속)의 연설은 이듬해 헬무트 콜 당시 총리(기독민주당)의 독일 통일로 현실화 됐다. 독일 속담을 차용한 그의 연설 문구는 1차적으로 동서독의 재결합을 의미했지만 자신이 추진한 동방정책(ostpolitik)의 발전적 계승을 뜻한 것이기도 했다. 중도 보수 성향의 기민당과 중도 좌파 성향의 사민당은 외교 노선이나 경제 개발 방식, 세금 운영 등 여러 정책에서 의견이 엇갈리는 라이벌 정당이다.
그런데 콜 전 총리는 기민당의 전통적인 친미 외교 노선을 유지하면서도 동독 및 동유럽 국가들과의 교류와 경제협력을 강조한 사민당의 동방정책을 계승했다. 동서독 분단 직후 기민당이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미국의 대소련 봉쇄정책에 적극 협력한 것에서 180도 달라진 것이다. 이는 통독에 대한 미소 열강과 주변국들의 동의를 얻어내는 데 기여했다. 사민당의 동방정책을 기민당이 완성함으로써 독일 통일이 가능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중대한 국가안보 이슈를 놓고 여야가 합의를 이루는 독일의 정치문화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우며 러시아와 밀착하자, 연정 협상에 들어간 기민당과 사민당이 방위비 확대를 협의하고 있는 게 대표적이다. 외신들에 따르면 최근 총선에서 승리한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민당 대표가 25일(현지 시간) 사민당 소속 올라프 숄츠 총리와 면담했다. 두 사람은 우크라이나 지원과 국방력 강화를 위해 특별방위비 편성 등을 논의했다고 한다. 그동안 기민당이 줄기차게 반대해 온 국가부채 한도 규정 개정도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기민당은 숄츠 총리의 사민당 연립내각이 부채 한도 규정을 어겼다며 헌법재판소에 제소해 위헌 결정을 받아냈었다.재정적자를 극도로 경계해 온 메르츠 대표와 기민당이 기존 원칙을 버리고 서둘러 방위비를 늘리려는 것은 당면한 안보 위협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협상에서 러시아와 밀착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탈퇴 가능성을 시사하는 등 유럽에 대한 안보공약을 약화시키고 있어서다. 이는 확고한 친미주의자였던 메르츠 대표가 입장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그는 총선 잠정 개표 결과가 발표된 23일 “미국이 이제 유럽의 운명에 무관심하다”며 “나의 최우선 과제는 가능한 한 빨리 유럽을 강하게 해, 단계적으로 미국으로부터 진정한 ‘독립’을 달성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발(發) 안보 위기를 여야가 머리를 맞대며 숙의 중인 독일에 비해 한국은 어떤가. 대북 정책의 핵심 원칙과 맞닿아 있는 북한인권법은 여야 이견으로 발의된 지 11년 만인 2016년에야 국회를 가까스로 통과했지만, 아직까지도 법에 규정된 북한인권재단이 출범조차 못 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이사 추천을 거부하고 있어서다.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은 함께 성장한다’는 독일 속담처럼 우리 여야도 안보에서만큼은 합의를 이뤄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 본다.
김상운 국제부 차장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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