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주택에 유원지, 학교까지 품었다… 경성 확장 한계선 넓힌 명수대[염복규의 경성, 서울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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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중반 고급주택지 붐 일어… 동서 벗어난 한강 남쪽 이례적 개발
명수대에 日중산층 겨냥한 주택 외 호수-벚꽃길-온천 갖춘 유원지 조성
조선인 학교 유치해 융화 상징 돼… 개발업자 꿈 더해 독특한 주택지로

일제강점기인 1935년 경기 시흥군 북면 흑석리(현 서울 동작구 흑석동) 명수대 주택지 전경.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일본인 중산층을 위한 고급 주택지와 유원지가 조성됐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일제강점기인 1935년 경기 시흥군 북면 흑석리(현 서울 동작구 흑석동) 명수대 주택지 전경.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일본인 중산층을 위한 고급 주택지와 유원지가 조성됐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경성의 교외 주택지 개발 열풍

1920년대 중반 이후 경성에서 두드러진 사회 현상 가운데 하나는 외곽 지역의 고급 주택지 개발 붐이었다. 가파른 인구 증가와 도심 생활환경의 악화, 이른바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교외에서 쾌적한 삶을 누리려는 중산층 (주로 일본인)의 수요가 맞물린 결과였다. 유동적인 경제 상황 속에서 토지를 가장 확실한 투자처로 여긴 개발업자의 정서도 한몫했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일제 말기까지 약 20년 동안 수십 곳의 주택지가 조성됐다. 위치는 충정로, 장충동, 신당동 등 경성 행정구역의 동서 경계 안팎에 걸쳐 있었다. 그러나 한강 남쪽으로의 개발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한강은 경성의 도시 확장의 한계선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다만 경기 시흥군 북면 흑석리, 오늘날 서울 동작구 흑석동 일대에 조성된 명수대(明水臺) 주택지는 예외였다. 명수대는 이름 그대로 풍광이 좋고 물이 맑은 곳에 자리한 주택지라는 뜻이다. 명수대 주택지는 1929년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세 차례에 걸쳐 개발됐다. 택지 면적만 약 15만 평이었는데, 주택지를 포함한 전체 개발 규모는 그 몇 배에 이르렀다. 주택지만 조성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앙 저지대 습지를 파 인공호수인 ‘명수호’를 조성하고, 붕어와 잉어 약 2만 마리를 풀어 낚시터를 만들었다. 호수 한가운데에는 인공섬을 만들고 외부와 연결하는 붉은 다리를 놓았다. 곳곳에는 벚나무를 심어 경관을 꾸미고 산책로도 마련했다.

주택지 안에는 간이 온천과 일본식 여관도 들어섰다. 당시 고급 주택지를 조성할 때 주민을 위한 부대시설을 어느 정도 포함시키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명수대는 그 정도를 훨씬 넘어섰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경치 좋은 곳에 주택지를 포함한 광활한 유원지를 조성한 것이다. 1937년 경성관광협회가 펴낸 ‘관광의 경성(觀光の京城)’에서는 명수대를 “성장하는 경성의 이상적인 주택지”이자 “새롭게 경성의 관광지로 데뷔하려는 곳”으로 소개했다. 또한 “신설된 하이킹 코스는 당일 일정으로 느긋하게 즐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유원지로서의 명수대는 사회주의문학 활동을 하다 전향한 소설가 김남천의 1940년 작품 ‘속요(俗謠)’에도 등장한다. 작품 속 인물 김경덕, 홍순일, 이정임은 10여 년 전 일본 도쿄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함께했던 옛 동지들이다. 현재는 모두 전향해 평범한 생활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우연히 명치정에서 만나 같이 술을 마신다. 술자리가 끝난 뒤에도 유부남과 유부녀인 홍순일과 이정임은 헤어지지 않는다. 두 사람을 태운 택시는 경성역과 용산역을 지나 한강을 건넌다. 이정임은 홍순일이 자기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알지 못하지만, 가 본 적 없는 한강 남쪽으로 향하는 “기이하고도 재미스러운 드라이브”를 즐긴다. 홍순일이 밀회를 위해 이정임을 데려간 곳은 명수대의 고급 일본식 여관이다.

192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흑석리 일대는 어떤 연유로 고급 주택지 후보가 된 것일까. 명수대 주택지를 개발한 인물은 후쿠오카 출신의 기노시타 사카에(木下榮)였다. 그는 도쿄외국어학교를 졸업한 뒤 조선으로 건너와 고향 선배인 시키 신타로(志岐信太郞)의 인정을 받아 1911년 토건회사 시키조(志岐組)에 입사했다. 이후 그는 시키조를 비롯해 같은 계열의 시키공업회사, 조선천연빙(天然氷)회사 등의 중역으로 근무했다. 시키조는 러일전쟁기 경부선 철도 부설 공사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1910년대 한강인도교(현재 한강대교) 공사를 맡으면서 크게 성장한 회사였다. 조선천연빙회사 역시 겨울철 한강의 얼음을 채취해 저장·판매하는 사업을 했다. 이처럼 회사의 주요 사업이 한강 변과 연관돼 있었다. 기노시타는 시키조의 여러 사업에 관여하면서 흑석리 일대의 개발 가능성을 눈여겨보았던 것 같다.

명수대 내 효사정. 조선 세종 때 우의정 노한이 세운 정자를 1993년에 복원했다. 복원 전 이 자리에 한강신사가 있었다. 사진 출처 한국관광공사

명수대 내 효사정. 조선 세종 때 우의정 노한이 세운 정자를 1993년에 복원했다. 복원 전 이 자리에 한강신사가 있었다. 사진 출처 한국관광공사
명수대 주택지에서 특히 눈에 띄는 시설이 강변의 한강신사다. 이 신사는 1912년 신타로가 “사재를 털어 한강 수호의 뜻을 담아”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은 조선시대 효사정(孝思亭)이 있던 자리로 알려져 있다. 효사정은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노한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로, 한강을 굽어보는 풍광이 단연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 곳이었다. 1910년대 일본인 마을도 없는 곳에 신사를 세운 이유는 한강 일대를 사업 기반으로 삼은 회사의 성장과 안전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20여 년이 지나 명수대 주택지가 개발되면서 한강신사는 이 지역 일본인 마을의 정신적 구심점이 된 셈이다.

‘주택지의 왕좌’ 등의 문구를 내세운 명수대 주택지 분양 홍보 팸플릿. 사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주택지의 왕좌’ 등의 문구를 내세운 명수대 주택지 분양 홍보 팸플릿. 사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명수대 주택지는 다른 일본인 중심의 고급 주택지와는 다소 다른 면모를 보인다. 개발 과정에서 중앙보육학교, 경성상공실무학교, 은로(恩露)학교 등 여러 학교를 유치했는데, 그 상당수가 조선인이 주로 진학하는 학교였다. 중앙보육학교의 경영자 임영신은 학교 이전 과정에 대해 “장송이 낙락하고 울울하여 춘하추 세 계절 동안 장안의 사람들이 산책과 정유(情遊)를 일삼는 산자수명한 명수대에 여자전문학교를 세워 보려 했다”며 “땅임자 되시는 목하(木下) 씨는 나의 이 계획에 크게 찬동하고 여러 가지로 도와주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실제 기노시타는 학교 측에 최소 한도의 매매 가격으로 1만1000여 평을 매도했고, 기숙사 부지로 1500평에 이르는 토지를 기부했다.(임영신, ‘한강반(漢江畔)에 신설되는 여자전문학교’, ‘삼천리’ 1936년 2월호)

신축된 학교의 교육환경은 우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한 재학생은 학교의 분위기를 이렇게 회상했다. “반도의 긴 역사를 싣고 쉼 없이 흐르는 영원의 침묵자 한강을 옆에 끼고, 그 건너편 이름조차 아름다운 명수대 송림 사이에 석조 철근콘크리트 화려한 3층의 새로운 웅자(雄姿), 음악실 속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멜로디는 명수대의 맑은 공기를 고요히 흔들며 송림 사이를 스쳐 석양에 노 젓는 뱃사공의 귀에까지 울려갈 것이며, 명수대 산골짝의 이름 모를 풀포기들은 속삭이는 듯 그윽한 향기 속에 취하여 하늘하늘 떨고 있다.”(‘중앙대학교 60년사’, 1978년)

그런가 하면 기노시타는 “사회사업 방면에 눈을 기울여 오던 바 조선인 자제 교육이 너무나도 뒤떨어졌다는 것에 큰 느낌을 가”진 것이 은로학교(현재 흑석동 은로초교의 전신)에 기부한 계기가 됐다고 말한다. 은로학교는 1908년 개화파 유길준이 설립한 학교다. 유길준이 사망한 뒤 뚜렷한 경영 주체가 없어 만성적인 운영난 속에 겨우 유지되고 있었다.

“은로학교 자제들을 위하여 거액을 기부하였다. 이 은로학교는 30여 년이라는 장구한 역사를 가진 학교인데 부채로 인하여 존폐 문제까지 있어 학교의 부채 4000여 원을 맡기로 하고, 또 토지 2500여 평을 기부하여 학교를 명수대로 이전 신축할 것과 앞으로 모든 경영 책임을 지기로 모든 수속을 완료하였다 한다.”(매일신보 1936년 4월 5일)

명수대 주택지는 주택지 및 유원지를 넘어 일종의 ‘교육도시’라는 문화적 이미지를 얻게 됐다. 또 일본인 마을 한복판에 조선인 학교들이 자리 잡으면서 내선 융화의 상징성도 갖게 됐다. 이를 통해 기노시타는 이익을 추구하는 유능한 개발업자를 넘어 지역사회의 유지로 발돋움했다. 그는 1936년 4월 경성 행정구역 확장 이후 처음 치러진 경성부회 선거에서 명수대 일대 거주자 2000여 호의 득표를 기반으로 당선됐다.

일제강점기 경성 영역의 확장과 주택지 개발의 흐름, 중산층의 교외 지향, 부동산 개발을 통한 이윤 추구, 개발업자 이상의 사회적 지위를 얻고자 한 기노시타의 열망이 어우러지면서 명수대는 다른 지역과 구분되는 독특한 주택지로 탄생했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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