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대학포럼] 〈228〉기술은 사람과 땅을 살리는 데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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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성 한국생산기술연구원 미래전략본부장·한양대 HYU-KITECH 공동학과 학연교수김필성 한국생산기술연구원 미래전략본부장·한양대 HYU-KITECH 공동학과 학연교수

'지방소멸'이라는 말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이는 단순한 인구 감소를 넘어 지역 산업과 공동체 기반의 점진적 해체를 의미한다. 대한민국 혁신 역량과 기술 생태계의 토대가 무너지는 구조적 위기이며, 우리의 생산기지이자 삶의 터전, 지속가능한 혁신의 출발점의 소멸이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의 지역 과학기술혁신 역량지수(R-COSTII)에 따르면,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 격차는 지속 심화되고 있다. 수도권은 비수도권 평균의 1.7~2.1배에 달하며, 비수도권의 상당수는 여전히 평균 이하에 머문다. 이는 혁신 생태계 전반의 구조적 불균형을 보여주며, 기술·인력·네트워크가 수도권에 지나치게 집중되는 현실을 명확히 드러낸다.

한편 정부출연연구소는 그간 대덕연구단지를 중심으로 국가연구 수행에 매진해왔다. 그러나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에 따르면 전국 100여개 이상의 지역조직을 운영 중이며, 이는 지역밀착형 혁신의 잠재력을 의미한다. 이제 이러한 조직들이 지역에 위치하는 단순 거점이 아닌 지역 혁신의 주체로 자리매김할 필요성이 있다. 지역 대학, 지자체, 기업과 실제 현장에서 협력하며, 맞춤형 기술 지원, 인력 양성, 산업 실증을 이끌어야 한다. 출연연의 이러한 변화는 산학연·부처·지역을 잇는 실질적 협력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제는 경쟁이 아니라 전략적 협력과 기술 내재화의 시대다. 지역기업이 살아야 청년이 머물고, 청년이 머물러야 지역이 지속가능하다. 예컨대 전북의 농기계 산업, 경북의 자동차 부품 클러스터 등 지역별 특화산업에 현장 맞춤형 기술지원과 제조업 혁신모델이 적용돼야 한다. 이를 위해 산학연이 현장 밀착형 연구개발과 인력 양성 체계를 동시에 가동해야 한다.

청년 인재의 수도권 유출을 막는 데 그치지 않고, 지역이 필요로 하는 인재를 키우고 남게 만드는 전략도 중요하다. 지역 산업구조와 인력수요를 정밀 분석하고, 현장 중심 재교육과 계약학과, 공동학과, 마이크로러닝 확대가 요구된다. 단순 교육이 아니라, 산업과 교육이 일체화된 지역형 인재 순환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이러한 전략은 해외 유학생에게도 적용 가능하다. 지역 대학과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를 통해 유학 온 인재들이 지역에 애정을 갖고, 직장을 찾아 오래 머물게 해야 할 뿐 아니라, 귀국 후에도 글로벌 협력의 교두보가 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지자체와 지역기관이 정주여건을 지원하고, 출신국과 지역 간 산업·연구 협력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지역 농수축산업도 간과할 수 없는 경제의 기둥이다. 고령화와 노동력 부족이 심화된 1차 산업에 인공지능(AI), 로봇 등 제조혁신기술을 접목해야 한다. 이는 농수축산업의 생산성 향상과 지속가능성 확보, 더 나아가 1차 산업 중심의 제3세계 국가로의 혁신 수출로 이어질 수 있다.

아울러 지역혁신 플랫폼과 공간은 첨단 벤처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소상공인과 뿌리기업 등 다양한 주체들이 접근 가능한 공간이어야 한다. 산학연의 인프라와 자원을 보다 유연하고 포용적으로 개방해 지역 전체의 혁신역량을 끌어올려야 한다. 중앙 주도에서 지역 자율 거버넌스로의 전환이 절실하다.

최근 정부 각 부처도 지역을 살리기 위한 전략을 앞다투어 내놓고 있다. 교육부의 RISE(지역혁신중심 대학지원체계), 산업부의 지역대표산업 육성과 스마트특성화 기반구축, 과기정통부의 지역 주도 R&D 확산 등이 그 예다. 그러나 이들 정책이 병렬적 흐름에 그쳐선 안 된다. 산학연 연계 플랫폼 내에서 유기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부처 간 협력과 정책 수렴이야말로 지역혁신 생태계의 강력한 순풍이 될 수 있다.

'임원경제지' 저자로 잘 알려진 조선후기 실학자 서유구는 기기는 반드시 실용에 맞게 하고, 농민의 고달픔을 덜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기술은 결국 사람과 땅을 살리는 데 쓰여야 한다는 철학적 선언이다. 지금은 '분권'이 아닌 '상생혁신'의 시대다. 산학연이 손을 맞잡고 지역을 살릴 때, 대한민국호는 거친 파도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고 항해할 수 있을 것이다.

김필성 한국생산기술연구원 미래전략본부장·한양대 HYU-KITECH 공동학과 학연교수 feeli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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