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공지능(AI)은 이미 산업 전반의 혁신을 이끌며 국가경쟁력의 새로운 기준이 되고 있다. 제조업, 금융, 의료, 물류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AI는 노동생산성을 높이고, 자동화 수준을 높이며, 인간의 사고와 판단을 대체할 수 있는 '가상 지능 노동력'을 만들어내고 있다. 스탠퍼드대 찰스 존스 교수는 AI의 등장이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경제성장의 가속화를 불러올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러나 한국은 이 거대한 전환점에서 핵심기술, 인력, 인프라 측면에서 주요 선진국 대비 뒤처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제조업 강국인 한국은 AI와의 융합 없이는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렵다. 선진국들은 이미 AI를 활용한 예측 유지보수, 품질 관리, 공급망 최적화 등을 산업 표준으로 정착시키고 있다. 반면 한국의 AI 기술력은 아직 한계가 뚜렷하고, 반도체 역시 메모리 중심의 구조에 갇혀 시스템 반도체, AI 반도체 분야에서는 경쟁국에 비해 후발주자다.
이에 한국 정부는 'K반도체 전략'을 통해 2030년까지 622조원 규모의 투자로 세계 최대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한 바 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은 이미 510조원 이상을 투입해 메모리와 시스템 반도체 양쪽 모두에서 기술 초격차를 확보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전략의 성공은 기술과 자금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또 하나의 결정적 축은 바로 '전력'이다.
AI 산업과 반도체 산업은 상상을 초월하는 전력을 필요로 한다. 데이터센터 운영, 대규모 AI 모델 학습, 고도화된 반도체 생산라인은 모두 안정적이고 고품질의 전력 없이는 작동할 수 없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글로벌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가 2022년 460TWh에서 2026년에는 1050TWh로 두 배 이상 증가할 것으로 본다. 미국에서는 AI 산업의 전력수요가 6년 만에 80배 이상 폭증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전력 품질과 낮은 전력 단가로 첨단산업 유치에 유리한 조건을 갖췄지만, 앞으로의 수요를 감당하려면 전력 시스템의 근본적 혁신이 필수다. 탄소중립과 고품질 전력공급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현실적 해답은 원자력이다. 특히 소형모듈형원자로는 AI 데이터센터와 같은 국지적 고전력 수요를 충당할 수 있는 분산형 전원으로 이상적이다. 원자력은 24시간 안정적인 출력을 제공하면서도 탄소를 거의 배출하지 않는다. 따라서 AI와 반도체 중심의 미래산업을 뒷받침하려면, 원자력 중심의 전력 인프라 확충 전략이 병행되어야 한다. 발전소 건설뿐 아니라 송전망 강화, 에너지 저장 시스템 확대, 스마트그리드 기술도 함께 발전시켜야 한다. 전력망 최적화 과정에서도 AI는 다시 중요한 도구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K반도체 벨트'를 중심으로 수도권과 충청권에 월 770만장의 웨이퍼 생산이 가능한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를 조성 중이다. 또 소재·부품·장비 국산화, EUV 리소그래피 장비, 첨단 패키징 기술 등의 고도화와 함께 팹리스 육성도 병행되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공급망은 전력 없이는 공허한 플랫폼에 불과하다.
AI 생태계는 단순한 기술 경쟁이 아니다. 대규모 컴퓨팅파워, 신뢰 가능한 데이터 인프라, 윤리적 규율, 안정적인 에너지 기반이 함께 맞물려야 한다. 한국은 2026년 시행될 'AI 기본법'을 통해 고위험 AI 시스템에 대한 차등 규제와 함께, 혁신을 저해하지 않는 유연한 법적 틀을 준비 중이다. 하지만 법 제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규제 완화, 인재 양성, 기술 투자, 국제협력까지 총력전이 필요하다. 한국은 이미 고품질 전력, 세계 수준의 반도체 제조역량, 혁신적 기업과 우수한 인재라는 3박자를 갖추고 있다. 여기에 원자력을 포함한 안정적 전력 인프라와 정책적 실행력이 더해진다면, 우리나라가 AI 글로벌 허브로 도약하는 것은 가능성이 아닌 현실이 될 수 있다.
이제 한국은 기술과 전력, 정책, 인재를 종합한 AI 생태계 전쟁에서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 글로벌 기술강국으로의 도약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전력기반 AI 생태계는 단순한 산업 경쟁력의 차원을 넘어 미래 사회의 지속가능성과 국가의 신뢰 기반까지 결정짓는 핵심 자산이다. 지금은 과감한 실행력과 속도가 필요한 시점이다.
박지영 경제사회연구원 원장·서울대 객원교수 jyp219@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