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의 온상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보다 보안성과 익명성이 부각된 덕이다. 한국 경찰의 수차례 수사 협조 요청에도 텔레그램은 일절 응하지 않은 채 범죄자들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줬다. 불법 음란물 유통을 막기 위한 ‘n번방 방지법’이 시행되자 오히려 텔레그램 가입자가 수십만 명씩 늘어난 건 아이러니다. 해외에 서버를 둔 외국 기업은 규제에서 쏙 빠진 탓이다. 지난해 불법 계엄 사태 때도 카카오톡이 검열될 수 있다는 괴담이 퍼지자 시민들은 텔레그램부터 깔았다.
▷그런데 5년 만에 다시 텔레그램 탈출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이번에는 일반 가입자가 아니라 텔레그램을 방패 삼아 활개 치던 범죄자들이 중심이다. 한국 경찰과 텔레그램이 핫라인까지 구축해 수사 공조에 나서자 범죄자들이 텔레그램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한결같이 수사에 비협조적이던 텔레그램은 지난해 8월 파벨 두로프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가 프랑스 검찰에 체포되자 태도를 바꿨다. 이용자 간 대화가 서버에 전혀 남지 않는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었다.
▷텔레그램은 234명의 피해자를 성착취한 이른바 ‘자경단’ 사건을 시작으로 수사 협력에 물꼬를 튼 뒤 한국 경찰의 자료 요청에 90% 넘게 협조하면서 하루 3번꼴로 소통하고 있다. 텔레그램에서 벌어지던 성범죄, 마약 등 강력 범죄뿐만 아니라 투자 리딩방 같은 신종 사기 수사에도 속도가 붙었다고 한다. 문제는 범죄자들이 추적을 피해 해외의 다른 보안 메신저로 갈아타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국가안보국(NSA) 감청 프로그램을 세상에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이 쓴다고 해서 유명해진 ‘시그널’이 대표적이다.▷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다 같이 시그널로 갈아타면 끝 아님?”, “보안 쪽에선 시그널이 좋음” 등의 글들이 퍼지고 있다. 과거 ‘드루킹 댓글 조작’ 사건에 이 메신저가 쓰였고 윤석열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도 계엄 관련자들과 시그널로 소통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용자 아이디가 없는 메신저 ‘심플엑스 챗’, 동유럽에서 많이 쓰는 ‘바이버’ 등도 범죄자들이 숨어드는 곳이라고 한다. 이들 메신저가 초창기 텔레그램과 닮아 있어 새로운 범죄 소굴이 될까 걱정스럽다. 하지만 텔레그램이 결국 꼬리를 내린 것처럼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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