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신광영]인명 구하려 문 부순 소방관들이 배상 걱정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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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한 소방서가 한 달 전 빌라 화재로 뒤탈을 겪고 있다. 화재 직후만 해도 신속한 조치로 인명 피해를 최소화했다고 평가받았던 사건이다. 불이 난 시간은 오전 3시경이었다. 2층 주인집에서 시작된 불이 4층 빌라 전체로 번졌다. 소방관들이 한 집씩 문을 두드리며 주민들을 대피시키는데 여섯 집에서 응답이 없었다. 새벽이라 깊이 잠들어 있거나 연기에 의식을 잃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불길이 빠르게 퍼지고 있어 지체할 새가 없었다. 소방관들은 여섯 집의 현관문을 강제로 뜯고 들어갔다.

▷소방관들의 대응은 칭찬할 만했지만 현관문 수리비를 누가 부담할지를 놓고 문제가 생겼다. 통상 화재 진압 중 발생한 피해는 건물주가 든 화재보험으로 배상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 화재로 사망한 건물주는 보험에 들지 않았다. 소방서가 가입한 행정배상보험이란 것도 있는데 소방관의 과실로 손실이 생겼을 때만 적용된다. 이번처럼 적절한 조치로 인한 피해는 보험 처리가 안 된다.

▷소방 활동은 불가피하게 재산 피해를 수반한다. 소방관들이 아파트 베란다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유리창을 깨거나, 유리 파편이 떨어져 주차된 차량을 파손하기도 한다. 나무 위 벌집을 제거해 달라는 요청에 사다리를 타고 화염방사기를 쏘다가 나무에 불이 옮겨붙자 비싼 나무를 망쳐놨다며 배상을 요구받는 일도 있다.

▷소방관들의 민·형사 책임을 면제해주는 법이 몇 년 전 생기긴 했다. 하지만 피해가 불가피했음을 소방관이 입증해야 하고,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주민들 민원이 계속돼 십시일반 돈을 걷어 배상하는 일이 아직도 적지 않다. 일부 소방관들은 열쇠 전문가를 초빙해 문을 부수지 않고 개방하는 법을 배운다고 한다. 소방차 진입을 막는 불법 주정차 차량에 대해선 파손해도 면책되는 법이 도입되긴 했지만 이 역시 차주들 민원과 소송 부담으로 집행 사례가 거의 없다.

▷빌라 화재 현관문 수리비 500여만 원은 소방 예산을 대는 광주시가 물어줄 방침이라고 한다. “물에서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란 것이냐”는 비판도 있지만 세입자들 역시 사정이 넉넉지 않고 화재 발생에 전혀 책임이 없는 이들이다. 소방관과 주민의 문제로 방치할 것이 아니라, 어느 쪽도 피해 보지 않도록 시스템을 촘촘히 만들어야 할 책임이 국가에 있다.

▷억울하게 책임을 지게 된 소방관들은 마치 근로자가 산업재해를 당하고도 보호받지 못할 때 겪는 심리와 유사한 감정을 느낀다고 한다. 이런 일들이 계속되면 소방관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몇 초 차이로 생사가 엇갈리는 현장에서 소방관들이 문을 강제로 열어도 될지, 불법 주정차 차량을 밀고 가도 될지 망설인다면 그 피해는 결국 국민의 몫이다. 걱정 없이 화재 진압과 인명 구조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서 더 많은 소방 영웅들이 나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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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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