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승련]피해국인데 패전국 취급… 젤렌스키의 슬픈 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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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만큼 트럼프 시대를 맞아 신세가 뒤바뀐 지도자도 없을 듯하다.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 시절 그는 칙사 대접을 받았다. 미 의회 상하원 합동 연설을 화상 연설을 포함해 2차례나 했다. 까다로운 선정 기준 때문에 일본 총리도 2차대전 이후 80년 동안 3번밖에 서지 못한 자리다. 유엔, 주요 20개국(G20) 등 외교 무대에서 젤렌스키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침략당했지만, 자유의 가치를 위해 싸우는 동지로 대우받았다. 그러나 28일 미-우크라이나 정상회담은 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원하던 실지(失地) 회복, 나토 가입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의 손을 들어주면서 물 건너갔다. 이번 회담의 핵심은 광물협정이다. 미국과 우크라이나는 전쟁 복구를 위해 우크라이나의 희토류와 원유 이익금 50%를 모아두는 펀드를 만들기로 했다. 트럼프는 처음엔 “펀드에 720조 원이 쌓일 때까지는 미국이 전액 갖고, 그 이상 걷히면 적절히 배분한다”는 방안을 제시했다. 젤렌스키는 제국주의식 강탈에 가깝다며 반발했다. 최종 합의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미국의 안전보장 다짐을 얻기 위한 ‘투항’을 예상하는 이들이 많다. 침공당한 피해국이지만 패전국처럼 대우받게 됐다.

▷트럼프 진영에 괘씸죄에 걸린 것이 젤렌스키의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해석도 있다. 젤렌스키는 지난해 미 대선을 앞두고 미군 소유 155mm 포탄 공장을 찾았다. 그곳은 하필 대선 최대 격전지였던 펜실베이니아주였는데, 트럼프식 ‘일방적 전쟁 중단’에 반대하는 우크라이나계 유권자가 10만 명 넘게 사는 곳이다. 민주당 주지사가 밀착 수행하면서 젤렌스키가 트럼프보다 민주당 후보를 편든다는 인상을 남겼다.

▷트럼프는 초기 구상에 거부감을 보인 젤렌스키를 “지지율 4%에 그치는 독재자”라고 불렀다. 젤렌스키가 2019년 임기 5년 대통령에 당선됐으나 전쟁통 계엄 상태에서 지난해 선거를 치르지 않고 건너뛴 것을 꼬집은 것이다. 미국 갤럽의 우크라이나 여론조사에 따르면 젤렌스키 지지율은 50%대를 유지하고 있지만, 트럼프는 이런 정도 숫자 오류는 개의치 않았다. 트럼프는 “그를 독재자라 불렀었나? 믿기지 않는다”며 빠져나갔다.

▷트럼프 2기가 표방하는 강대국 중심 외교는 더 선명해졌다. 이상과 가치를 나누는 국가끼리 동맹하고 연대하는 2차대전 이후 외교 문법보다는 강대국끼리 자기 세력권을 인정받아 이익을 챙기는 19세기 외교 방식이 중심에 서게 됐다. 약소국의 이익은 잊힐 수밖에 없다. 미국은 이번 주 유엔 안보리에 “러시아에 전쟁 책임이 있다”는 표현을 뺀 결의안을 냈다. 우리가 알던 미국이 맞는지 헷갈릴 지경이다. 워싱턴에 정권교체가 있었을 뿐인데, 국제 외교의 틀이 150년 전으로 후퇴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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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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