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서 화제가 된 그림이 있다. TSMC, SK하이닉스, LG, 애플 이름표를 단 4명이 삼성맨 한 명을 에워싸고 두들겨 패는 그림이다. 이들 4개 기업은 각각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메모리반도체, TV·가전, 스마트폰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진검승부를 벌이고 있는 경쟁사. 주력 사업마다 라이벌들에게 얻어터지고 있는 삼성전자의 현실을 담은 이 그림에 사람들은 ‘촌철살인’이란 찬사를 보냈다.
모든 사업을 다 하는 ‘종합 반도체 기업(IDM)’의 몰락. 지난해 글로벌 반도체산업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다. 중앙처리장치(CPU)와 인공지능(AI) 가속기 설계·생산, 파운드리를 다 하는 인텔, 메모리반도체 설계와 생산,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이미지센서 설계, 파운드리까지 가진 삼성전자는 ‘반도체 제국’으로 군림한 과거의 위상을 잃어버렸다.
반도체 기업 매출 세계 1, 2위 자리를 놓고 10년 넘게 각축을 벌인 두 거인의 몰락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과거엔 내부 수직계열화를 통해 밀도 있는 협업과 신속한 의사 결정이 가능했다. 복잡한 시스템이 필요 없다 보니 비용도 덜 들었다. AI 시대가 되면서 달라졌다. AI를 제대로 돌릴 수 있는 고성능 반도체가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반도체 성능을 대폭 끌어올리는 데는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간다. 한 우물만 파는 엔비디아, SK하이닉스, TSMC 등은 하나의 ‘전공 분야’에 목돈을 쏟아부을 수 있지만, 모든 걸 다하는 인텔과 삼성전자는 한정된 자원을 여러 사업에 나눠 투입해야 한다. 각각의 분야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된 셈이다.
한 우물만 판 기업이 성공
여러 사업을 벌이는 기업이 고전하는 건 비단 반도체 분야만이 아니다. 1980년대 글로벌 가전 시장을 호령한 일본의 소니, 파나소닉 등 종합 정보기술(IT) 기업의 몰락도 그런 예다. 신사업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LG전자가 주식시장에서 외면받는 이유 중 하나도 ‘한 지붕 여러 가족’이다. 초대형 냉난방기(칠러), 자동차 전장(전기장치), 콘텐츠 서비스 등 미래 사업의 면면만 놓고 보면 현재 LG전자의 시장가치(약 13조원)를 훌쩍 뛰어넘는다는 평가를 받지만, 가전 같은 전통 사업과 섞여 정체성이 흐릿해지다 보니 성장성을 100% 인정받지 못한다는 얘기다.
무분별한 사업 확장 지양해야
사업 경쟁력 약화만 문제인 게 아니다. 사업 부문별로 달성해야 하는 목표와 이해관계가 다르다 보니 회사 내 갈등이 커지기도 한다. 삼성전자 반도체(DS)부문 안에서도 주력인 메모리사업부와 신사업에 속하는 파운드리사업부, 시스템LSI사업부 사이에 상당한 갈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사업부 탓에 영업이익이 빠져 성과급을 덜 받게 됐다는 글이 내부 게시판은 물론 반도체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에도 하루에 몇 개씩 올라올 정도다.
경영 전문가들은 그동안 한국 기업들의 ‘성공 방정식’이었던 사업 확장과 수직계열화의 함정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말한다. 막대한 투자와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한 AI 시대에는 더 이상 유용하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한국 기업사에는 법인 분리를 통해 리스크를 분산하고, 비효율을 제거한 사례가 많다. 삼성디스플레이가 그랬다. 삼성전자의 LCD사업부로 남았다면, 투자 우선순위에서 반도체와 스마트폰에 밀려 경쟁력을 잃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삼성전자의 최대 라이벌인 애플을 고객으로 확보하지 못했을 수도 있을 터다.
기업 경영에 정답은 없다지만, ‘AI 시대’란 달라진 환경에 맞게 조직을 재정비하는 건 뒤로 늦출 수 없는 숙제 같은 일이다. 결단의 시간은 많이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