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애독서 목록에는 성경과 함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상단에 있다. 마키아벨리는 국가 간 조약과 약속에 대해 “통치자가 도덕률에 따라 신의를 지켜야 한다고 믿고 행동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고 했다. 상대국에 동맹 파기, 적국과 제휴 등 압박으로 자국을 따르도록 하는 게 군주가 할 일이라고 가르친다. 트럼프의 전략과 일맥상통한다.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 모델로 알려진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미군의 명예로운 철군을 위해 남베트남을 압박해 1973년 파리평화협정을 체결했다. 그는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나 얼마 안 가 사이공은 함락됐다. 우크라이나를 비핵화하는 대신 미국 영국 러시아가 안전을 보장해 주는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도 허망하긴 마찬가지다.
트럼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 편을 들며 자유 진영을 흔들고 있다. 물론 미국과 동맹인 한국과 우크라이나 처지를 비교하는 것은 과도하나 미국의 한반도 안보 정책이 아이젠하워·닉슨·카터 행정부의 주한미군 감축 또는 철수 추진 등 자국 이익 우선에 따라 출렁였다는 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우크라이나 종전 이후 트럼프의 외교 안보 추는 인도·태평양, 한반도가 될 것이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향한 “협상 카드는 있냐”는 트럼프식 거래는 한국도 해당된다. 게다가 트럼프 1기 때보다 외교 안보 상황이 훨씬 심각해졌다. 미국이 침공국 러시아에 면죄부를 줘 북한의 도발 야욕을 부추기고, 한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입김은 더 세질 것이다. 북핵 협상이 미·북·러 구도로 짜이고, 트럼프는 핵 동결 수준에서 치적으로 과시할 것이라는 불안한 전망도 나온다. 트럼프로선 북한 비핵화는 짧은 임기 내 어려울뿐더러 반대급부를 듬뿍 줘야 해 수지타산에도 맞지 않다. 주한미군 철수 카드로 방위비 분담금 대폭 인상과 한·미 연합훈련 비용 떠넘기기 등 압박은 상수다. 트럼프 참모들은 미국 도시의 북핵 공격 위험 노출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핵우산을 제공해야 하는지에 의문을 제기한다.
장기 목표는 북한 비핵화에 두되 트럼프 임기 4년 맞춤 전략이 필요하다. 키신저가 소련 견제를 위해 중국을 끌어들이려던 것과 반대로 미국이 중국 견제를 위해 러시아를 활용하는 ‘역키신저 전략’을 쓰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트럼프 정부의 안보 실세 엘브리지 콜비 국방차관 후보자는 대중 견제 우호국으로 한국은 담장 위에 서 있다고 했는데, 주한 미군기지의 전략 가치를 각인시킬 필요가 있다. 미군 해외 기지 중 최대인 1467만7000㎡(약 444만 평)에 이르는 평택 미군 기지를 한국 돈으로 지었고, 도로·항만 이용료와 각종 세금 감면 등을 감안하면 한국의 실제 방위비 분담금이 공식 분담금의 2~3배에 이른다는 점도 부각해야 한다.
트럼프는 유럽과 일본에 방위비 규모를 국내총생산(GDP) 3% 이상에 맞추라고 한다. 우리에게도 곧 닥칠 요구다. GDP의 2.8%인 국방비와 방위비 분담금을 적정하게 올리는 대신 주고받을 ‘그랜드 바겐’을 준비해야 한다. 핵연료 재처리와 우라늄 농축 권한 획득, 전술핵 재배치, 핵무장 등을 미국 요구 수준에 맞춰 각각의 카드로 유효하게 꺼내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때맞춰 콜비 후보자도 돈이 드는 핵우산 대신 한국의 자체 핵옵션 허용이 미국 이익에 더 기여한다는 주장을 편다. 일본 호주와의 군사적 협력 강화는 트럼프의 인도·태평양 전략에도 부응한다. 일본 총리가 제안한 미·일 핵공유 구상에 한국 참여도 검토할 만하다. 미군 전략자산 전개 중단에 대비해 3축 체계를 조속히 추진하고 대량응징보복 능력을 끌어올려야 한다. 병사 월급 대폭 인상 포퓰리즘으로 전략 무기 확충 기회 비용을 더 이상 날려선 안 된다.
한국의 뛰어난 군함 건조와 유지·보수·정비, 포탄 생산 등 방산 능력을 지렛대 삼아 핵추진잠수함 기술 지원을 얻어내는 전략도 짜야 한다. 북한이 탐지가 어렵고 무한 잠수가 가능한 핵잠수함 건조를 과시하고 있는데, 현실화 땐 우리 안보를 맨몸으로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를 막을 수 있는 것은 핵잠수함밖에 없다. 국제질서 규범 파괴가 판치는 냉혹한 시대에 한·미 동맹이 언제까지 철통같을 것이란 낙관은 금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