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1기 집권 시기 대북 정책은 결과적으로 북핵 괴물을 초래했다. 트럼프는 집권 초 ‘화염과 분노’ 충격요법으로 북한을 협상장에 끌어냈다. 이후 김정은과의 세 번 회담을 보면 애초부터 북한 비핵화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2018년 6월 싱가포르 회담 합의문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CVID)’가 빠졌다. 김정은은 비핵화 한마디도 안 했다. 트럼프는 “CVID는 핵심이 아니다”고 했다. 한·미 훈련 중단을 김정은에게 안겨줬고, 주한미군 철수를 원한다고 했다.
2019년 2월 ‘하노이 노딜’은 트럼프가 사전 작정한 결과다. 회담 내내 그를 괴롭힌 코언 청문회 이슈를 덮기 위해선 합의보다 협상 파기가 더 파급력이 있다고 봤다. 김정은은 고농축 우라늄 시설은 놔두고 낡은 영변 핵시설만 없애겠다고 해 파기 명분을 줬다. 그해 6월 판문점 회담도 트럼프가 일본 G20 정상회의에 참석했다가 ‘트윗 번개’로 이뤄지는 바람에 북한 비핵화 논의는 없었다. 트럼프 대북 정책이 미국 언론의 혹평대로 ‘리얼리티 쇼’로 끝나는 바람에 북핵과 투발 수단을 고도화하는 시간만 벌어줬다.
트럼프 집권 2기 미국 북핵 해법이 혼란스럽다. ‘핵보유국(nuclear power)’ ‘북한 비핵화’가 혼재돼 있다. ‘nuclear power’가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처럼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해 제재를 풀어주겠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다만 이 용어의 파급력을 감안하면 함부로 꺼내선 안 된다. ‘트럼프 뜻대로’가 1기 때보다 심화하고 있다는 점도 불안하다. 우크라이나 종전 중재에서 러시아 손을 들어주며 기존 가치동맹과 적의 경계선이 허물어졌다. 나라 간 합의도 무시된다. 강화된 한·미 확장억제가 무력화될 수 있다. 유럽과 일본에 가하는 방위비 압박을 보면 한·미 방위비 합의도 무용지물로 만들 것이다.
게다가 트럼프는 김정은을 향해 “많은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누군가와 잘 지내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 “미국의 목표는 분쟁 회피”라는 등 참모들 사이에선 북핵 현실을 인정하고 군비 통제 선에서 협상하는 게 현실적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북한 비핵화보다 트럼프 임기 내에 아무 일이 없도록 상황 관리에 초점을 맞추자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쉽사리 협상장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 트럼프 1기 이후 핵무기 수십 기가 만들어지고, 어느 미사일에든 탑재 가능한 표준화, 규격화를 이뤘다. 핵무기를 개발해놓고 포기한 나라는 없다. 김정은이 트럼프의 러브콜에 ‘핵무력 더욱 고도화’로 대응하는 것은 하노이 노딜 같은 일을 또 당하지 않겠다는 ‘밀당’이다.
요컨대 트럼프는 김정은을 협상장으로 끌어내려면 그의 높아진 요구 수위를 충족해줘야 한다. 북한은 미국이 대통령 임기 내 단기 업적에 연연하는 점을 진작부터 활용했다. 노벨상을 받고 싶어 하는 트럼프의 욕심을 역이용할 것이다. 미국 본토를 위협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내주고 동결 수준에서 핵 군축 협상을 통한 제재 해제 및 경제 지원, 한·미 훈련 중단 등을 기대할 수 있다면 협상장에 나올 것이다. 이런 수준에서 접점을 찾는다면 우리에겐 악몽이다. 제네바 합의, 9·19 공동성명 등 핵 동결에서 멈춘 숱한 사기적 해법의 재판(再版)이다.
미국 정권에 따라 우리 안보가 출렁이고,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도 힘의 논리가 적용되는 냉혹한 현실인 만큼 자강(自强)과 대미 협상 ‘지렛대 전략’이 중요하다. 트럼프의 방위비 분담금 인상 압박 땐 이미 여러 지적이 나왔듯,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와 우라늄 농축 제한을 풀어 핵 잠재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한·미원자력협정 개정을 요구해야 한다. 러시아 의존도가 높은 미국의 농축 우라늄 분야 협력도 카드가 될 수 있다. 저궤도 위성 등 우주 안보 협력도 요구 리스트에 올려놔야 하고, 전시작전권 조기 전환에도 대비해야 한다.
한·미 훈련 중단과 주한미군 감축엔 전술핵 재배치 또는 자체 핵무장을 꺼낼 필요가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핵 개발 결기는 완전한 주한미군 철수를 막는 데 기여했다. 미국이 원하는 함정 건조, 유지·보수·정비 분야 협력을 원자력 추진 잠수함 개발의 기회로 살려야 한다. 북핵 능력만 키우고 우리 안보만 약화되는 일은 더 이상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