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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모르니까…” 사랑니 버리지 말라는 엄마[2030세상/박찬용]

6 days ago 4

“혹시 모르니까 잘 알아보고 둘 수 있으면 둬라.”

연례 가족 제사가 끝나고 함께 걷던 중 엄마가 말했다. 안부를 나눌 겸 나의 사랑니 발치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나는 딱히 아프지도 않고 바쁘기도 해 사랑니를 뽑지 않은 채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건강검진에서 ‘뽑을 때가 됐다’는 의사의 말이 떠올라 최근 한쪽을 뽑았고 나머지도 곧 뽑을 예정이었다. 엄마는 임플란트 시술 등에 쓸 수 있으니 좀 더 생각해 보라고 했다. 이제 사랑니까지 버리지 말라는 건가 싶었다.

박찬용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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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성격이 그랬다. 엄마는 잘 못 버린다. 옛날 물건도 지난 기억도. 본가에 가면 버리는 게 나을 정도로 낡은 물건들이 그대로 있다. 지금보다 집 형편이 안 좋을 때부터 있던 것들이다. 엄마는 그때 그 물건들을 힘들여 장만했던 생각이 나서 못 버리겠다고 한다. 이 말처럼 엄마는 그걸 갖고 살던 때의 고된 기억도 잘 못 버린다. 고집이 세서 우리가 ‘이제 생각을 바꾸시라’고 해도 잘 바꾸지 않는다. 의심이 많아서 그런 속내 이야기를 가족 아닌 남에게도 잘 하지 않는다.나는 어릴 때 엄마의 그런 성향이 싫었다. 불편하니까. 쓸모없는 낡은 물건을 버리고 쾌적하게 살고 싶었다. 다 지난 슬픈 옛이야기 말고 오늘과 내일의 즐거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런 일들로 다투거나 대든 적도 적지 않다.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까. 왜 지난 물건과 기억을 못 버리나. 그러던 중 혼자 나와 살 나이가 되었다. 독립의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버리지 못하는 엄마의 성격도 있었다. 내 힘으로라도 쾌적한 환경을 만들고 싶었다.

엄마의 성격이 어디서 왔는지는 몰라도 내게까지 왔구나 싶을 때가 있다. 나도 옛날 물건을 잘 못 버린다. 예전 결심들을 잊지 않고 지키려 한다. 그러니 나는 잘 모르겠지만 남들에게 고집 있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한번은 지인이 내가 카드 결제 영수증을 잘게 찢는 걸 보고 신기해했다. 엄마를 닮아서였다. 엄마는 의심이 많아 늘 개인정보에 예민했다. 별로 잃을 게 없는데도. 나도 그러고 있다. 엄마처럼.

자기 부정과 자기 극복이 비슷한 듯하면서 다르다는 것을 나이가 들며 조금씩 알게 된다. 어릴 때는 부모든 뭐든 나를 이루는 요소들을 부정하고 싶을 때가 있다. 지금의 자신과 달라지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도 필요하다. 반면 사랑니를 뽑듯 스스로를 계속 개선시켜야 하되 뽑아낼 수 없는 나의 일부도 있다. 엄마에서 내게로 이어지는 고집, 성향, 의구심 역시 내 시선으로 이어져 지금처럼 원고를 쓰며 먹고살 수 있는 것 아닐까. 도저히 고쳐지지 않는 건 잘 유지하고 활용할 수밖에 없다.

며칠 뒤 나는 예정대로 발치했다. 엄마의 말은 마음으로만 받아두고 반대쪽 사랑니도 시원하게 뽑았다. 발치 첫날 저녁. 지혈이 잘 안돼 병원에서 준 예비 거즈가 생각났다. 봉지를 열어보니 거즈는 다섯 장. 무심코 한 장만 떼어 지혈을 하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차피 일회용인데 이걸 아낀다고 한 장만 꺼내다니. 나는 그 한 장짜리 거즈를 바로 버리고 두 장 더 꺼내서 넉넉하게 지혈했다. 혹시 몰라 나머지 두 장은 남겨뒀다. 엄마 아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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