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두과자 다섯 알에 빚진 편지[고수리의 관계의 재발견]

3 weeks ago 4

어떤 기억은 사무쳐 평생 잊지 못할 이름으로 남기도 한다. 나는 우유를 보면 재호가 떠오른다. 눈사람을 보면 고은이 떠오르고, 손으로 접은 쪽지를 보면 우정이, 카세트테이프를 보면 기원이 떠오른다. 재호, 고은, 우정, 기원. 누군가에겐 평범한 이름들이 나에게는 우유와 눈사람과 쪽지와 카세트테이프로, 그에 깃든 유일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중 몇몇은 여전히 교우하고, 몇몇은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살다가 문득 떠오르는 이름들은 나를 뭉클하게도, 미안하게도 만든다.

고수리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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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미는 나에게 호두과자로 남아 있다. 보미와는 대학에서 친해졌다. 주성치 영화를 지나치게 좋아하다 보니 중국어를 지나치게 잘하게 되어버렸다던 신기한 애. 우리는 좋아하는 음악과 영화와 책 취향이 잘 맞았고 대화가 잘 통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고학생이란 공통점도 있었다. 보미는 친구가 별로 없고 일면 괴짜처럼도 보였지만, 내겐 너무나 선명해서 부러운 친구였다. 취향이 확실하고 좋아하는 일에 열렬하고 하고픈 건 일단 해보는 용감한 애. 보미를 따라 홍대 앞 북토크에 가봤고, 탱고를 추는 밀롱가에 가봤다. 주성치 영화 ‘선리기연’은 내 인생 영화로 남았다.

졸업 후에 우리는 꿈 대신 밥을 선택했다. 당장 돈을 벌기 시작했다. 첫 월급은 소중한 사람에게 쓰는 거라며 보미가 배즙을 보내줬을 때, 네가 어떤 일을 하며 월급을 받고 이 비싼 걸 보내줬는지 묻지 못했다. 그저 고마워. 배즙이 너무 달아서 목구멍까지 알알했다. 직장과 상황이 자주 바뀌는 사이에도 우리는 가끔 만났다.

그래도 나는 밥 말고 꿈. 진로를 바꿔 방송일을 시작하며 고군분투하던 시기에 보미는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우연한 기회로 중국 예술 작품 통번역 일을 보미에게 소개해줬다. 서울에서 보미가 번역했던 무대를 함께 보았던 날, 보미를 자취방에 재워 보냈다. 네가 만든 무대가 얼마나 멋졌는지,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밤새워 얘기했다. 나는 보미가 여기, 이 세계에 있었으면 했다.

보미는 편지와 호두과자 다섯 알을 두고 갔다. ‘수리야. 네가 지치고 힘겨울 때도 넌 여전히 햇살 같은 아이란 거 잊지 마. 훗날 쓰게 될 네 글이 기대된다. 지금 내가 줄 수 있는 건 호두과자 몇 알뿐이지만, 또 보자.’

그저 고마워. 동그랗고 말랑하고 다디단 호두과자를 까먹으며 나는 촬영장으로 출근했다. 허무하게도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바쁘게 살다 보니 우리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연결될 연도, 접해질 점도 없는 우리는 미숙하게 헤어졌다. 보미는 사라졌다.

언젠가 그늘진 운동장에서 내가 말했지. “나 밝아지려고 노력할 거야.” 그때 네가 대답해줬어. “노력하지 않아도 넌 밝은 사람이야”라고. 그저 고마워만 했던 게 미안해. 후회는 그림자가 길다. 이제라도 호두과자 다섯 알에 빚진 마음을 보낸다. 그간 부지런히 글을 썼으니 우연히라도 읽어주길 바라면서. 보미야. 잘 지내니. 호두과자 가게를 지날 때마다 널 생각해. 네가 준 기억으로 나는 여전히 밝은데, 너는 어떻게 살고 있니. 보미야. 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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