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독도 주권에 대한 일본의 도발은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 전 한국 정부가 독도 주권 수호를 위해 선포한 1952년 1월 ‘평화선 선언’(한국 연안의 50∼60마일 수역에 대한 주권 확인)이 그 기점이다. 일본 정부는 이를 무력화하기 위해 1953년부터 4회에 걸쳐 한국 정부에 구상서를 제시한다. 주목할 것은 3회 차까지 ‘무주지(無主地) 선점론’을 주장하던 일본 정부가 1962년 4회 차에서 ‘고유 영토론’을 제기한 점이다.
일본 정부는 1905년 독도 무주지 선점론의 국제법상 흠결로 인해 1962년 17세기 고유 영토론을 공식 제기했다. 그러나 독도가 17세기부터 일본의 고유 영토라면 1905년에 무주지로 선점할 필요가 없고, 1905년 독도를 무주지로 선점하였다면 17세기 고유 영토를 부정하는 점에서 상충한다. 일본 정부가 1962년에 제기한 고유 영토론도 1693년 안용복 피랍 이래 시작된 울릉도 쟁계(爭界) 이후 에도 막부의 1696년 ‘도해금지령’(일본 어민의 독도 출어 금지)과 메이지 정부의 1877년 ‘태정관지령’(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영토가 아니라고 확인)에 의해 역사적 권원(權原)으로 정립이 불가하다.
이로 인해 일본은 냉전의 대두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의 기조가 전환되는 지점을 활용해 미국 정치고문 윌리엄 시볼드를 동원한 로비를 전개했다. 그러나 제6차 미국 초안에서 유일하게 독도가 일본령으로 표기된 후 최종 조약문에선 생략됨으로써 실패로 종결됐다.바로 이 지점에서 1905년 독도 침탈 전후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이 1897년 3월 세계 1호로 국제법학회를 설립해 침략 정책의 개발과 실현에 동원하기 위해 국제법 법리를 왜곡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02년부터 발간한 학회지인 ‘국제법잡지’에는 한국 침략 정책을 주도하는 다수의 논문이 게재돼 있다.
더욱이 일본 정부가 은폐해 온 ‘외무성 임시 취조위원회’(1904년 3월∼1906년 2월)는 전원 국제법학자로 구성해 일제 식민주의 침략 정책을 법리적으로 구축한 기구로, 존속 기간이 독도 침탈과 을사늑약 강제 시기와 일치하며 위원들은 후속 강제병합론까지 주도한다. 특히 1943년 사망할 때까지 외무성 고문으로 활동한 다치 사쿠타로는 유럽 제국주의의 식민지 취득 방식을 무주지 선점론과 결부해 일본의 독도 권원 법리를 왜곡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일본 정부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내재된 일제 식민주의와 1943년 한국의 독립을 최초로 천명한 ‘카이로 선언’상의 일제의 ‘폭력과 탐욕’은 본질적 실체로서 일치한다. 일본의 국제법 법리 왜곡으로 귀결되는 문제점에 대해 규명하고 공유함으로써 동북아 평화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일본의 진정한 역사적·국제법적 책무의 수행을 촉구하고자 한다.도시환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실장·독도체험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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