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번역의 애로[폴 카버 한국 블로그]

3 weeks ago 4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폴 카버 영국 출신·번역가

폴 카버 영국 출신·번역가
한국 드라마를 번역하려면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많다. 한국 드라마가 세계 여러 나라에 시청자를 두고 있기 때문에 번역할 때 느끼는 책임감이 더더욱 크다.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와 한국 정서를 최대한 살리면서 원본 자료를 정확히 전달해야 하는 동시에, 한국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는 사람들도 거부감이나 이질감 없이 콘텐츠에 접근할 수 있도록 번역해야 한다. 특히 42글자, 최대 2줄 내에서 그 모든 의미를 전달해야 하는 작업이 어렵다. 문화적 요소가 내포된 한국어 문장을 영어로 서술해서 전달하면 보통 훨씬 더 긴 문장이 되기 일쑤다.

번역에 딱 한 가지 정답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 다른 번역가들과 함께 한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 영어 번역본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흥미로웠던 점은 대부분의 번역가들이 해당 번역본에 대해 개선의 여지가 꽤 많다고 공감했는데, 각자 재번역한 결과는 전부 다 달랐다는 것이다. 같은 구절에 대해 10명의 번역가에게 번역을 요청하면 10개의 각각 다른 번역본이 나온다는 얘기다. 거기 모인 번역가들은 단 하나의, 가장 최선의 번역을 도출해 보고자 서로의 머리를 맞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각자 자신의 언어적 선택과 번역 방식이 더 낫다며 다소 신경질적인 고성도 오갔다.

어떤 사람들은 번역이 두 언어 간 일대일 치환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번역은 텍스트의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 없는 단어 선택의 연속이다. 여기에 더해 이 처음의 선택들은 텍스트의 후반에 가면서 또 여러 번 바뀔 수밖에 없다. 전반부에 숨겨져 있던 줄거리가 중후반부에 드러나거나 내용에 반전이 일어나면서 그렇기도 한데, 이 모든 것은 정말 흔히 일어나는 번역 과정이다. 이전의 선택이 추후에 다른 표현으로 대체되는 것은 다반사다.

완벽한 번역이 있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긴 하지만, 다른 번역가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번역할 문서를 다룰 때마다 항상 최선의 번역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무엇보다 번역 과정에서 제일 어려우면서도 빈번하게 고민해야 하는 부분은 직역과 의역 사이에서 밸런스를 맞추는 일이다. 한국의 문화적 맥락에 충실하겠다며 일정한 단어를 선택하고 나면 외국인이 듣기에 다소 이질적인 번역이 되고, 한국적 요소를 희생해서 다른 선택을 하면 한국의 고유한 분위기가 번역에 녹아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간극을 상황에 맞게 끊임없이 조정하면서 번역을 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번역은 시작과 중단의 끊임없는 반복이기도 하다. 몇 페이지에 해당하는 긴 대화가 수월하게 번역되는 때가 있어서 신나다가도, 갑자기 단어 하나 때문에 번역이 10분 이상 중단되면 짜증이 솟구치기도 한다. 최근에 번역했던 사극을 한 사례로 들 수 있다. 극 중 주인공은 한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철릭이라는 전통의상을 입었는데, 주인공 외의 다른 등장인물들은 당의와 관복을 입으면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한 내용이었다. 독자 가운데 이 전통의상들의 차이점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특이한 한복을 어떻게 번역해야 옳을지 씨름하면서 인터넷 검색으로 정말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또 한 가지는, 한국이 일본보다 훨씬 늦게 해외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빚어지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한국 문화가 세계로 침투하는 강도와 속도는 이전에 일본 문화가 세계 무대에 알려질 때보다 훨씬 강력해 보인다. 하지만 일본이 선두주자로서 여러 분야에서 선점한 분야가 많다 보니 두 나라 간 유사해 보이는 문화적 현상을 번역할 때 일본어가 차용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는 점이다. 노래방이 ‘가라오케’로, 회가 ‘스시’로, 만화가 ‘망가’로, 라면이 ‘라멘’으로 번역되는 사례들이 그렇다. 정치적 문제로 비화될 수 있어 사뭇 다른 성격의 논의가 될 수 있지만, 동해를 ‘동해(East Sea)’ 대신 ‘일본해(Sea of Japan)’로 번역하는 사례도 있다. 정치·문화적으로 형평성에 맞는 단어 선택과 더 많이 알려진 보편성에 근거한 단어 선택 사이에서 번역가는 끊임없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데 나도 예외는 아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한류 덕분에 ‘김치’ ‘고추장’ ‘치맥’ 등 한국 문화를 지칭하는 많은 단어들이 영어에 편입되고, 심지어 영어 사전에도 등재된 덕분에 특별한 보충 설명 없이 번역에 그대로 쓸 수 있는 단어들이 많이 늘었다는 것이다. 내가 처음 한국에 왔던 20년 전만 해도 한국에 대해 무지했던 영국 친구들은 ‘대한민국’을 남한인지 북한인지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으니 20년 동안 강산이 20번은 바뀐 느낌이다.

폴 카버 영국 출신·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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