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 밀어붙이고 낙오자에 가혹한 한국, 오징어게임 같은 사회 돼가” [월요 초대석]

1 week ago 2

실수 연예인 재기 용납않는 행태 반복… 美투어 K팝 가수 상담 요청해 오기도
우울증 향한 편견 보여준 하늘이 사건… 美선 정신과 응급실서 환자 적시 치료
‘노력하면 다 가능’ 맹신 땐 실패에 혹독… 나 교수도 학생 때 불안 우울에 시달려
‘멘털이 약하다’ 소리 듣기 싫어 숨겨… 약점 드러낼 수 있는 관대한 사회 돼야

1일 미국 코네티컷주 뉴헤이븐 자택에서 본보와 화상 인터뷰를 하는 나종호 예일대 정신과 교수. 줌(ZOOM) 화면 캡처

1일 미국 코네티컷주 뉴헤이븐 자택에서 본보와 화상 인터뷰를 하는 나종호 예일대 정신과 교수. 줌(ZOOM) 화면 캡처

《나종호 예일대 정신과 교수(42)는 한국에서 의대를 나와 미국에서 전공의 수련을 한 의사다. 현재 예일대 산하 병원에서 환자들을 만나고 중독과 자살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미국의 정신 건강 관련 문화와 제도를 경험해 온 나 교수는 그만의 시선으로 한국을 관찰해 왔다. 그는 배우 김새론 씨가 과거 음주 운전 사건 이후 집요한 비난에 시달리다 최근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소셜미디어에 글을 올렸다. ‘실수하거나 낙오된 사람을 버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지나가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거대한 오징어 게임 같다’고 썼다. 죄는 엄히 처벌하되 사람에게 파괴적 수치심을 부여해 벼랑으로 내모는 일은 이제 멈춰야 한다고 했다. 1일 화상 인터뷰로 그를 만나 더 자세한 진단을 들어봤다.》

―한국에선 연예인들 자살이 유독 많은 것 같다.“한국의 연예인 사회는 일종의 자살 유가족 집단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제 지인이 한 아이돌 가수의 빈소에 갔더니 비슷한 또래 가수들이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바닥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자살자의 유가족은 자살 위험이 높은데, 좁은 연예인 사회에서 동료의 자살을 자주 봐왔기 때문에 더 취약할 수 있다.”

―정신 건강 관리가 특히 중요한 직업인 것 같다.

“미국 투어를 온 K팝 그룹으로부터 상담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 대형 소속사의 유명 가수들이어서 정신 건강도 잘 관리받는 줄 알았는데 미국에 있는 저한테 도움을 청해 와 놀라웠다. 연습생 시절엔 혹독한 훈련을 받느라 상담받을 여력이 없었을 것이고, 유명해진 뒤엔 정신과 치료를 받는 게 알려질까 봐 미뤄 온 게 아닐까 싶다.”

―연예인들은 인격적 비난에 취약한 편인가.

“이들에게 여론의 공격은 정신적 상처는 물론 생계와도 직결된 문제다.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올 길이 막혀버린다. 김새론 배우도 카페 일을 하며 재기하려 했던 것 같은데 결국 좌절됐다. 잘못에 대해선 당연히 처벌받아야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올 퇴로가 완전히 차단당하면 누구라도 버티기 어렵다.”

―이번 사건에서 오징어 게임이 떠오른 이유는.

“오징어 게임 참가자들은 옆에서 많은 사람이 죽는 걸 보고도 금방 또 잊고 다음 게임으로 넘어간다. 연예인들 자살이 이어지는 현 상황도 비슷하다. 잠시 추모하는 듯하다 어느새 잊고 또 다른 연예인을 죽음으로 내모는 행태가 반복되고 있다. 누군가가 죽어야 굴러가는 오징어 게임 속에서 살고 있는 게 아닌데 현실은 그렇지 않아 안타깝다.”

―연예계에서만 벌어지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동의한다. K팝 아이돌의 정신 건강 문제도 한국 사회 전반의 치열한 경쟁 문화에서 파생된 게 아닐까 싶다. 요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좋은 학원에 가기 위한 ‘7세 고시’까지 생겼다고 하는데 청소년들도 아이돌 연습생들 못지않은 경쟁 속에 살고 있지 않나.”

나종호 교수가 2023년 7월 기독교자살예방센터 라이프호프에서 자살 유가족들에게 ‘자살, 말할 수 있는 죽음’이란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나 교수 제공

나종호 교수가 2023년 7월 기독교자살예방센터 라이프호프에서 자살 유가족들에게 ‘자살, 말할 수 있는 죽음’이란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나 교수 제공

‘가용 한도 120% 사회’ 한국

―미국에서 보는 한국인들의 삶은 어떤가.“미국 병원 레지던트로 있을 때 병원 자체가 가용 한도의 80% 정도로 굴러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국은 가용 한도의 120% 이상을 요구하는 것 같다. 남들보다 앞서야 하고, 끝까지 밀어붙여야 한다는 압박을 늘 받았던 것 같다. 한국에선 감기에 걸리면 마음이 편해서 좋았다. 쉬어도 된다고 스스로 정당화가 되니까. 주변에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런 근성이 경제 성장의 에너지였지만 그 결과 번아웃과 우울증에 걸리는 사람이 많아지면 오히려 성장을 방해할 수 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아직 많다.

“노력의 가치는 소중하지만 맹신하면 부작용도 크다. 그런 인식이 지나치면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단정하게 된다. 그러면 낙오자를 버리고 가는 사회가 될 수 있다.”

―낙오의 대가가 혹독해 ‘공정’에 예민한 것 같다.

그래서 객관식 위주의 줄 세우기식 입시가 유지되는 것 같다. 결과 시비를 줄이려면 점수가 숫자로 나와야 하고, 그걸로 서열을 정하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선 나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을 우러러보게 되고 아랫사람에겐 가혹해지기 쉽다. 당하는 사람도 내가 더 열심히 안 한 탓이라고 자책하게 된다.

우울증 향한 편견 보여준 하늘이 사건

나 교수는 지난달 하늘이 사건과 관련해 ‘우울증엔 죄가 없다’는 글을 올렸다. 가해 교사의 우울증은 범행과 무관하고, 교사가 폭력적인 전조 증상을 보였을 때 신속한 분리 조치를 하지 않은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교사의 우울증을 문제 삼는 건 살인범이 당뇨병을 앓았다는 이유로 당뇨 탓에 범행했다고 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했다.

―이 사건 대책에 교사들 정신 검사가 포함됐다.

“부적격자를 솎아내려는 취지라면 교사들이 정신 질환을 더 숨기려 할 것이다. 서이초 사건 이후 교사들 자살이 이어졌는데 그런 대책은 교사들을 더 위험으로 내몰 소지가 있다. ‘교사들이 마음 놓고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 달라’는 하늘이 아버지의 호소와도 역행하는 것이다.”

―가해 교사의 우울증에 왜 관심이 쏠렸을까.

“정신 질환에 대한 낙인을 보여주는 것 같다. 링컨 대통령은 심한 우울증을 앓았는데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라는 걸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살인 사건처럼 안 좋은 일에는 우울증이 마치 원인인 것처럼 부각된다.”

―미국에선 정신 질환에 대한 인식이 다른가.

“미국 병원에는 정신과 응급실이 있다. 자살 생각이 강하게 들거나 심한 조현병 증상을 겪는 환자들이 새벽에도 응급실에 온다. 이런 상황은 중증 외상 환자 못지않은 긴급 상황이다. 환자 본인의 생명은 물론, 주변인들의 안전과도 직결된다.”

―상처가 안 보이면 안 아프다고 여기기 쉬운데….

“우울증 아내를 돌보던 남편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자살 생각을 억누르지 못하던 아내를 응급실에 데려갔다가 ‘멀쩡해 보이는데 왜 왔느냐’고 거부해 무릎 꿇고 빌었다고 한다. 한국의 응급실 사정이 열악한 건 안다. 그럼에도 한국은 우울증에 걸렸을 때 치료받는 비율이 11%로 매우 낮고(미국은 66%), 자살률이 20년 넘게 세계 1위인 걸 고려하면 정신과 응급실이 필요하다.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들 하는데 중증의 우울증은 뼈가 부러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가만 놔두면 낫지 않는다.”

―미국 전공의들은 정신 상담을 받는다고 들었다.

“병원에서 거의 무료로 해준다. 거기엔 자본주의적 계산도 있다. 전공의들의 정신 건강이 양호해야 비용을 아낀다고 보는 것이다. 사람이 우울하면 집중을 못 해 효율이 떨어지고 실수도 많아진다.”

―정신 건강에 투자하는 게 돈을 버는 길인가.

“정신 질환이 방치되면 노동력 손실, 생산성 감소, 복지 지출 증가로 이어진다. 몇 년 전 연구를 보면 우울증 환자가 5명 중 1명 정도만 치료받는다고 할 때 1만2000명이 초과 사망하고 GDP(국내총생산) 손실이 133조 원에 달한다고 예측됐다. 우리나라는 우울증 치료율이 10명 중 1명도 안 돼 손실이 더 클 것이다.”

―한국은 우울감을 더 키우는 사회가 되고 있다.

“한국인의 삶은 빠른 속도의 트레드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계속 뛰는 것과 비슷한데, 트레드밀에 오르는 나이가 갈수록 어려지는 것 같다. 그러면 삶의 연료가 금방 떨어지고 우울증이 찾아올 가능성이 높다. 초등학생 자살률이 최근 8년 새 5배 늘었다는 통계를 가볍게 보면 안 된다.”

―한국의 자살률도 여전히 높은 상태다.

한국처럼 자살률이 20년 넘게 1위인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다른 나라들은 자살율이 세계 최고로 나오면 다들 깜짝 놀라서 국가 주도로 자살률을 다 낮췄다. 북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그랬고 일본도 한때 우리만큼이나 자살률이 높았지만 지금은 우리의 2/3도 안 된다.

나종호 교수가 지난해 3월 김용 전 세계은행 총재와 함께 연세대 주최 ‘글로벌 지속가능발전 포럼(GEEF)’에서 한국의 정신건강의 중요성에 대해 대담하고 있다. 나 교수 제공

나종호 교수가 지난해 3월 김용 전 세계은행 총재와 함께 연세대 주최 ‘글로벌 지속가능발전 포럼(GEEF)’에서 한국의 정신건강의 중요성에 대해 대담하고 있다. 나 교수 제공

만일 내가 그때 내 말을 들어줬더라면

나 교수는 서울대 심리학과와 의학전문대학원을 거쳐 예일대 교수가 됐다. 화려해 보이는 경력이지만 그의 20, 30대는 불안감, 우울감이란 시한폭탄을 안고 조마조마해하며 버틴 시기였다. 그는 지난해 출간한 책 ‘만일 내가 그때 내 말을 들어줬더라면’에서 학생 시절 애써 숨겨 왔던 고통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당시 불안과 우울 증세가 어느 정도였나.

“하루는 우연히 마주친 선배가 ‘얘 말하는데 입술 떨리는 것 봐. 괜찮니?’라고 물어왔다. 그 전부터 불안하면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곤 했는데 얼굴로도 표출된 것이다. 그때라도 치료받았어야 했는데 입술이 떨리지 않도록 지그시 깨무는 습관이 생겼다. 의전원 시절엔 의예과 마치고 온 대부분의 동기들보다 대여섯 살이 많아 발표 조장을 맡곤 했지만 마이크만 잡으면 너무 떨어서 제대로 발표를 못 했다. 병동 실습 땐 교수님 질문에 블랙홀에 빠지는 일도 많았다. 나잇값도 못 한다는 생각에 갈수록 위축됐고 동기들도 피하게 됐다. 우울감에 빠져드니 집중력이 떨어지고 무기력해져 공부도 자취방 침대에 누워서만 겨우 했다. 어떻게든 졸업은 하자는 생각에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는 시험 족보를 눈에 바르듯 계속 봤다.”

―도움을 받아볼 생각은 안 했나.

“동기들과 술자리 중 우울증을 앓다가 유급한 친구 얘기가 나온 적이 있다. 동기들이 ‘그 친구 멘털이 강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고 말하는 걸 듣고 나도 티 내면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동기들에게 민폐를 끼쳐 미안했는데 더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의대를 그만둘 생각은 안 했나.

“부모님께 학교를 못 다닐 것 같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부모님은 ‘힘들면 언제든 그만둬도 된다. 어떤 선택을 해도 너를 지지한다’고 해주셨다. 만약에 ‘이제 곧 졸업인데 고지가 눈앞이니 조금만 참아보자’며 설득하려 하셨다면 더 깊은 우울로 빠져들어 그만두게 됐을 것 같다.”

미국 뉴욕 맨해튼 거리에 있는 마이클 펠프스 선수의 우울증 예방 광고. talk space 캡처

미국 뉴욕 맨해튼 거리에 있는 마이클 펠프스 선수의 우울증 예방 광고. talk space 캡처

―책에서 약점을 고백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뉴욕을 걷다 보면 세계적 수영선수 마이클 펠프스가 나오는 광고판을 보게 된다. 펠프스 하면 올림픽 때 결승점에 맨 먼저 도착해 환호하는 장면이 익숙한데 그는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광고 속 그는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로 ‘심리 치료는 제 인생을 바꿨다. 당신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저는 펠프스가 20개 넘는 금메달을 딴 것보다 자신의 우울증을 알려 비슷한 고통을 겪는 이들을 도우려 한 게 더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누구보다 강할 것 같은 사람이 약점을 솔직히 내보이면 다른 사람들도 용기를 내서 도움을 청할 수 있을 것 같다.”

―정신 건강 면에서 한국에 가장 필요한 건 뭘까.

“관대함이다. 나의 취약점을 꺼내 보일 수 있고 그걸 포용해주는 사회가 되면 좋을 것 같다. 그러려면 나 자신에게 먼저 관대해져야 한다. 내 안에 화가 덜 쌓이면 타인에게 들이대는 잣대도 너그러워진다. 나를 아끼는 마음과 남을 감싸는 마음은 서로 연결돼 있다.”

나종호 예일대 의대 정신과 교수

△2009년 서울대 심리학과 졸업
△2014년 서울대 의학전문대학원 졸업
△2016년 미국 하버드대 보건대학원 졸업
△2016~2017년 메이오 클리닉 정신과 레지던트
△2017~2020년 뉴욕대 정신과 레지던트
△2021년 예일대 중독정신과 전임의
△저서 : ‘뉴역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2022년)
‘만일 내가 그때 내 말을 들어줬더라면’(20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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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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