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주연에서 조연으로

2 weeks ago 4

[한경에세이] 주연에서 조연으로

주미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시절, 미국 공무원들과 대화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이 있다. “정부가 시장에서 승자와 패자를 결정하지 않도록 조심한다”는 이야기였다. 학창시절 경제학 수업에서 배웠던 공공재, 구축효과(crowding-out effect) 등 정부의 지나친 개입을 경계하던 이론이 있었지만, 공직 생활을 하면서 잊어버린 얘기를 미국 공무원에게서 들을 줄이야.

과거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 과정은 정부 주도로 이뤄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정부와 공공기관의 역할이 커진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선진국 반열에 오른 지금도 시장에서 공급할 수 있는 상품 및 서비스를 공공기관이 공급하거나, 정부가 시장에서 승자와 패자를 사실상 결정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공공기관이 사업을 추진할 때 금융기관은 정부보증을 믿고 대출심사를 느슨하게 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것이 사업 부실로 이어지는 사례도 있었다.

이제 우리 경제가 한 단계 성장, 발전하기 위해 정부와 공공기관이 경쟁의 룰을 바로 세우고, 민간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조연’ 역할에 충실할 때다. 비즈니스에서 정부를 비롯한 공공의 비중이 커질수록 ‘지대추구(rent-seeking)’ 행위는 늘어나고 혁신과 성장을 위한 동력은 떨어질 수도 있다.

무역보험공사도 수출기업을 지원하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은행, 손해보험사와 협력해 우리나라 금융기관의 해외시장 진출을 도와주는 역할(K파이낸스)을 강화하고 있다.

작년 8월 시중은행 중 한 곳과 협약을 맺고, 공사가 금융을 지원하는 수출기업의 해외프로젝트에 해당 은행이 대주단으로 참여할 길을 열었다. 반년 남짓 지났지만 벌써 해당 은행이 공사 보증을 토대로 국내 수출기업에 1억달러 규모의 금융을 지원한 성과도 이뤄냈다. 외화 조달에 유리한 글로벌 은행들이 장악하고 있던 해외 프로젝트 금융시장에서 의미 있는 진전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올해에는 해외 영업망을 갖춘 국내 보험사의 해외 영업 확대도 지원할 예정이다. 해외에 진출한 국내 보험사가 우리 기업의 해외 현지법인이 생산, 판매한 물건에 대한 대금 미회수 위험을 보장하고, 공사는 재보험 형태로 국내 보험사의 손실을 보장하는 상품 도입을 협의하고 있다. 이로써 국내 보험사는 해외 진출에 따른 리스크를 줄이면서 해외 영업망을 확대할 수 있다.

제조업 분야에서 글로벌 기업으로 활약하는 우리 수출기업은 많이 있지만 ‘24년 글로벌 은행 상위 10위권’에 우리나라 금융기관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공사와 은행, 손보사 등 민간 금융기관의 협력을 통해 수출기업도 돕고, 우리 금융기관도 발전하는 K파이낸스가 다른 분야로도 확산되기를 기대한다.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