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700조는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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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에세이] 700조는 어디로?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이 되니 여기저기서 연락이 온다. “이런 정책을 위해 예산이 꼭 필요하다”거나 “너무 중요한데 본예산에서 빠졌으니 고려해 달라”는 내용이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다 필요하고 중요해 보이지만 우선순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학과 1학년 시절 처음 배운 정치의 정의는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었다. 당시에는 외우기 바빴지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예산 심의를 하면서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란 말이 ‘예산을 정하는 힘’을 의미하고, 아주 정확한 정의임을 깨달았다.

좋은 취지의 법률도 예산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다. 무한정 돈을 쓸 수 있으면 좋겠지만 예산은 한정적이기에 결국 힘 있는 부처나 정당 지도부 등의 뜻이 반영돼 예산이 배분될 수밖에 없다.

정치인의 강한 권력 의지가 때론 부담스러워 보일 수도 있지만, 옳다고 생각하거나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게 존경스럽기도 하다.

나는 왜 정치를 하는가. 운이 좋아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가정환경에서 자랐기에 부모님 농사를 돕느라 공부할 시간이 부족한 친구들에게 미안하던 고교 시절부터 남들에게 덜 미안하게 살고 싶다는 건 내 삶의 화두 같은 것이었다.

어렵게 표현하면 ‘불평등의 완화’ ‘사회적 격차 해소’가 필요하고, 정치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정치인이 됐다. 현실 정치를 하면서는 공천을 받고 선거에서 이기는 전략과 인지도를 높이는 방법을 고민하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줄여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나라는 시장소득 기준으로 상위 20%가 하위 20%의 10배를 벌고, 처분가능소득으로는 6배 정도 차이가 난다. 자산 불평등 수준은 2017년 이후 지속적으로 커지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능력에 따라 살면 되는 것 아닌가 하겠지만 불평등이 심화하면 사회 갈등도 커지는 법. 국가가 경제 정책과 예산으로 불평등을 줄이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재정의 재분배 개선 효과가 38개 국가 중 34번째에 불과하다. 국가가 불평등을 완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본예산과 추가경정예산을 합치면 한 해 예산은 700조원을 훌쩍 넘는다. 이런 예산을 쓰고도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지금은 10억원도 맘대로 쓰지 못하는 예결위원이지만 더 큰 권한이 생기면 불평등을 완화하는 데 지금보다 많은 예산을 배분하고 싶다. 경제 규모만이 아니라 재정의 재분배 개선 효과도 세계 10위 수준에 오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예산이 필요하다고 설명하기 위해 국회의원에게 연락조차 할 수 없는 많은 국민이 ‘나를 위한 예산이 있다’고 느끼게 하고 싶다. 할 일이 많아 나도 권력 의지를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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