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경력 30년의 배우 하지원이 연기에 대한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하지원은 6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ENA 대회의실에서 진행된 ENA 월화드라마 '클라이맥스' 인터뷰에서 "이 작품을 만나기 전 고민을 하는 시간들이 있었다"며 "연기를 그만둬야 하나라는 생각까지 했다. 그래서 이 작품을 연기할 때 신인 같은 마음으로 임했다"고 털어놓았다.
'클라이맥스'는 대한민국 최고의 자리에 서기 위해 권력의 카르텔에 뛰어든 검사 방태섭과 그를 둘러싼 이들의 치열한 생존 드라마다. 정치와 재계, 연예계라는 서로 다른 세계가 맞물린 권력의 정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면서 매회 화제를 모으고 있다.
하지원은 과거 최고의 자리에 올라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살인 의혹을 받고 위기에 몰린 배우 추상아를 연기했다. 멜로와 액션, 사극과 현대극을 아우르며 깊은 감정 연기를 증명해 온 하지원은 정점 이후의 균열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을 밀도 높은 연기로 그려내 호평받았다.
특히 정보원 황정원 역을 맡은 나나와 파격적인 멜로 연기까지 선보이면서 '하지원의 재발견'이라는 평까지 나왔다.
하지원은 매 촬영마다 "감독님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면서도 "추상아를 연기했던 시간이 재밌었다"고 했다. 특히 추상아에 대해 "나도 여배우지만 어쩌면 이렇게 어려운 선택들만 하게 되느냐"면서 "보고 있으면 불쌍하고 눈물이 난다"고 애정을 드러냈다. 다음은 하지원과 일문일답.
▲ 오랜만의 인터뷰다.
= 영화 '비광'을 찍었는데 아직 개봉을 안 했다. 이것도 같은 감독님 작품이다. '비광'을 끝낸 후 '클라이맥스' 제안을 주셨고, 재밌게 촬영을 했다.
▲ '재밌게'라고 말하기엔 어둡고 어려운 역할이었다.
= '우와 재밌다'라기보다는 이 작품 안에서 다양한 인물들이 나오고, 관계를 맺으면서 선택을 하고 이야기가 펼쳐지는 지점이 흥미로웠다. 추상아라는 인물 자체가 재밌었다는 의미다. 촬영하고 연기하는 건 힘들었지만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작업이 즐거웠다. 추상아의 선택에 따라 이야기 구성이 달라지는데, 상아는 선과 악이 아닌 '생존'이 중요한 인물이었다. 선택에 의해 펼쳐지는 이야기들 속에서 상아의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고, 이 사회가 그녀를 괴물로 만드는 것 같았다. 우리가 놓인 이 사회에서 살아가며 선택을 하고,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는 방식이 궁금했다.
▲ 파격적인 연기 변신들이 화제가 됐다. 특히 동성 연애 장면을 처음 대본으로 봤을 때 어땠나.
= 추상아에게 한지수라는 인물은 쌍둥이이자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과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지수가 죽었을 때 나도 죽었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정원이라는 인물과 감정적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동성이라는 코드를 한지수라는 인물 때문에 녹여 넣은 것이라 생각했다. 동성 혹은 이성이라는 성별을 떠나, 한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의 본질적인 이야기를 찾아가는 느낌으로 접근했다.
▲ 그렇게 고민하며 연기했는데 "하지원과 나나가 뽀뽀했어"라는 반응이 나왔을 때 기분이 어땠나.
= 반응을 다 읽진 못했지만 "주지훈과의 러브라인을 기대했는데"라는 리뷰는 들었다. 그걸 아쉬워하는 시청자분들에게는 다음번에 좋은 정통 러브스토리 작품으로 보답하고 싶다.(웃음) 다만 이번 작품에서는 성별에 따른 코드보다는 권력과 욕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맺어지는 관계성에 더 집중해 주시길 바란다.
▲ 나나와의 호흡은 어땠나.
= 연기할 땐 서로 편하게 하다 보니 키스신도 힘들지 않게 잘 찍을 수 있었다. 정원 역의 나나 씨, 그리고 감독님과도 캐릭터에 대해 굉장히 많은 대화를 나눴기에 촬영에 무리는 없었다.
▲ 주지훈과 나나 중 누구랑 맺어지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 그걸 지금 다 말씀드릴 순 없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사건이 더 휘몰아친다는 점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다. 결말까지 재밌게 봐주셨으면 좋겠다. 상아에게 태섭은 동지 같고, 태섭에게 상아는 애정이라고 하더라.
▲ 주지훈과 연기할 땐 어땠나.
= 각자 하고 싶은 연기를 다 했다. 그걸 다 받아주니까 너무 재밌더라. 연기 수위가 낮은 게 아니라 광속으로 대사를 던지는데 그걸 또 다 받아친다. 이성 간의 전형적인 호흡이 아니라 서로 막 던지는 호흡이었는데, 그게 다 맞물리니까 정말 즐거웠다.
▲ 배우로서 배우를 연기하는 기분은 어떤가.
= 더 예민하고 날카로워야 할 것 같았다. 감독님이 외적으로도 아주 관리가 잘 된 배우의 모습이길 바라셨다. 극 중에서 슬립을 자주 입는데, 슬립이 몸에 딱 붙지 않고 여유가 있을 정도로 마른 핏이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5kg 정도를 감량해 44사이즈보다 더 작은 체구를 만들었다. 대본을 다 읽었을 땐 눈물이 났다. 대중의 사랑을 유지하고 살아남기 위해 한 선택들이지만, 그 과정에서 그녀가 점점 불완전한 존재가 되고 환경에 의해 정체성이 바뀌는 지점들이 가슴 아팠다. 그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연기하기 쉽지 않았다.
▲ 감정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장면은 무엇인가.
= 박재상에게 "나, 네 여자 하고 싶어"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박재상은 이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저는 그를 속이는 연기를 하는 상황인데 마음이 너무 힘들더라. 그날 촬영의 마지막 장면이었는데 테이크를 정말 많이 갔다. 감독님과 계속 찍는데도 추상아 특유의 미묘한 느낌이 살지 않아서 끝까지 "다시 하겠다"고 고집해 겨우 완성한 장면이다. 표정 하나하나에 여러 의미를 꼬아 넣어야 해서 고생을 많이 했다.
▲ 극 중 추상아가 연기를 아주 잘하는 설정은 아니더라. 이른바 '발연기'를 연기하는 기분은 어땠나.
= 감독님이 디렉팅을 많이 해주셨다. 과거 청춘스타였다는 설정이 있고, 연기력 논란이 있었다는 설정을 디테일하게 넣어주신 것 같다.
▲ 박재상 앞에서 연기하다가 의도가 통하지 않자 "아, 연기하기 힘드네"라며 본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이 섬뜩했다. 매니저나 주변 지인들의 반응은 어땠나.
= 저희 엄마가 무섭다고 하시더라(웃음). 거실에서 같이 보고 있는데 어머니는 무섭다며 방으로 들어가 버리셨다. 제 친구들도 "지원이 화 안 나서 다행이다, 화나면 저렇게 무서운 거 아니냐"며 반응하더라. 주변 가까운 사람들의 반응이 특히 뜨거웠다.
▲ 실제 연예계 종사자로서 극 중 묘사된 연예계와 현실의 차이는 무엇인가.
= 감독님이 현실을 그대로 옮기시지는 않은 것 같다. 드라마 시작 전에 "사실과 다른 허구의 이야기"라고 공지하지 않나. 저도 연예계 생활을 하며 이런저런 소문을 듣긴 하지만 팩트를 다 알 수는 없으니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명확히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다만 감독님이 극의 재미를 위해 적절한 수위를 맞추어 써주신 것이라 생각한다. 연예계뿐만 아니라 정치, 재계가 다 얽혀 있는 예민한 문제라 더 신경 쓰셨을 것이다.
▲ '피칠갑' 장면도 화제가 됐다.
= 실제 촬영 장소에 고가의 그림들이 걸려 있어서 피가 튀는 방향에 신경을 많이 써야 했다. 상대에게 모멸감을 주는 감정이 중요했고, 한 번에 통과하지 않으면 재준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리허설을 정말 많이 했다. 다행히 단 한 번에 오케이를 받았다. 뿌려진 달걀이 피부에서 팩처럼 굳어버려 장시간 물을 뿌려가며 힘들게 촬영했던 기억이 난다.
▲ 이 드라마는 욕망에 관한 이야기인데, 추상아의 욕망은 무엇이라 보나.
= 상아의 대사 중에 "시들어가는 것보다 부서지는 게 낫다"는 말이 있다. 그게 상아의 욕망을 관통하는 문장 같다. 배우는 대중의 사랑을 먹고 사는 직업인데, 추상아는 그 길에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까지 서슴지 않는다.
▲ 배우 하지원에게는 갖지 못해 힘든 욕망과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욕망 중 무엇이 더 큰가.
= 저는 연기를 시작한 이래 늘 저 자신과 싸워왔다.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어릴 때 "경쟁 상대가 누구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저에겐 항상 제가 경쟁 상대였다. 흥행 여부와 상관없이 제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이 중요할 뿐, 다른 감정은 크게 동요하지 않는 편이다.
▲ 동료 배우이자 선배로서 상아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
= 저도 배우지만 상아가 겪는 상황들은 배우가 할 수 있는 선택 중 가장 힘든 것들만 모아놓은 '끝판왕' 같다. 연기하면서도 "어쩌면 이렇게 힘든 일만 겪느냐"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냥 지켜보는 마음이 너무 불쌍했다. 본인의 의지든 타의든 괴물처럼 변해가는 그 과정이 안쓰러울 뿐이다.
▲ 연기 외에도 다양한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 그림도 그리고 사업도 하는 그 모든 모습이 저인 것 같다. 안주하며 편안함을 찾기보다 계속 도전하는 삶을 지향한다. 자산 관리나 재테크는 감사하게도 엄마가 다 해주셨는데, 이제 저도 스스로 해보려고 노력 중이다. 최근 예능 출연은 스무 살의 지원이를 다시 마주하는 느낌이라 뭉클했다. 범접할 수 없는 '스물다섯 살' 선배님들과 동기들이 정말 잘해주셔서 설레는 학교 생활을 하고 있다. 축제 준비도 열심히 하는 중이다.
▲ '클라이맥스'는 배우 하지원에게 어떤 작품으로 남을 것 같나.
= 영화 '비광' 개봉이 1년 정도 밀리면서 고민이 깊어지던 시기가 있었다. 진지하게 은퇴를 고민하기도 했다. 그런 시간을 거친 후 만난 작품이라 신인 같은 마음으로 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건 취미지만, 전시를 통해 대중 앞에 서면 책임이 따른다. 배우도 마찬가지다. 작품이 세상에 나오면 그에 따른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 추상아라는 인물을 시청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멋지게 만들어내야 한다는 사명감이 어릴 때보다 더 커졌다. 연기가 단순히 재밌었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인물에 대한 깊은 책임감을 느끼게 된, 저에게는 전환점 같은 작품이다.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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