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비단-노예를 공물로 받는 ‘템스강의 신’… 캔버스에 담긴 번영[양정무의 미술과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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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 기록한 대영제국 황금기
변방 섬나라에서 경제 대국 된 英… ‘부-교역 중심지’ 템스강 기념하려
베리, ‘상업 또는 템스강 승리’ 그려… 신과 탐험가, 항해사 한데 배치해
자신들 역사 언젠가 신격화 기대… ‘한강의 기적’ 담은 그림도 있을 것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템스강은 영국 남부를 가로질러 북해로 흘러가는 강이다. 영국을 점령한 고대 로마인들은 강폭이 좁아지면서 조수를 이용해 상류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지점을 선택해 도시를 건설했다. 로마인들은 이 도시를 ‘론디니움(Londinium)’이라 불렀는데, 훗날 이곳이 영국의 수도 런던이 된다.

오늘날 템스강은 런던의 경관을 대표하는 강으로만 여겨진다. 그러나 역사적 기원과 발전 과정을 보면 오히려 템스강 덕분에 현재의 런던이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16세기부터 런던브리지 동쪽에 항만 시설이 들어섰다. 이 시설 덕분에 런던의 인구가 1700년에 57만 명, 1800년에 90만 명으로 급속히 팽창하더라도 석탄, 곡물, 다양한 식료품과 공산품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었다.

런던 항구는 18세기에 이르러 세계 최대 규모로 성장한다. 예를 들어 1800년에는 동시에 1500∼3000척의 배가 정박할 수 있었고, 실제로 연간 1만2000척의 배가 런던 항구에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또 3만 명 정도가 부두 노동자로 일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당시 영국이 해외에서 수입하던 상품의 80%, 수출의 69%가 런던 항구를 통해 오갔다. 아시아에서는 차, 도자기, 목화, 면사, 향신료 등이, 아프리카에서는 상아, 과일, 팜유, 와인 등이, 아메리카에서는 담배, 쌀, 인디고, 면화, 옥수수 등이 런던 항구로 모여들었다.

정작 런던의 시내에서는 한때 세계를 제패했던 대영제국의 번영이 그리 뚜렷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제국을 건설한 국가의 수도라면 기대할 만한 거대한 건축물이나 웅장한 도로를 런던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템스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영국 런던의 항공 사진. 굽이치는 강을 따라 대영제국이 누렸던 경제적 번영의 원천, 운하와 독 등이 있다. 사진 출처 템스강협회

템스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영국 런던의 항공 사진. 굽이치는 강을 따라 대영제국이 누렸던 경제적 번영의 원천, 운하와 독 등이 있다. 사진 출처 템스강협회
이럴 때 영국 동쪽으로 발길을 옮겨보자. 런던탑과 타워브리지 너머 동쪽부터 템스강 양쪽에는 부두와 독이 계속 이어지고, 주변에는 거대한 창고 건물들도 줄지어 들어서 있다. 대표적으로 1805년에 건설한 런던 독은 100에이커(약 40만4685㎡) 규모에, 동시에 500척의 배가 정박할 수 있었으며, 창고의 저장능력은 23만4000t에 달했다. 여기서 런던이 한때 세계 최대 항구였다는 사실을 확실히 실감하게 되고, 대영제국으로 흘러들었을 엄청난 부의 규모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대영제국의 심장이었던 런던은 템스강을 통해 세계와 연결됐기에 영국이 이룩한 근대 문명을 ‘템스강 문명’이라고 불러도 좋을 듯하다. 이 시기에 벌어진 세계사적 변화 역시 ‘템스강의 기적’이라고 충분히 부를 수 있겠다. 유럽에서 영국은 변방의 섬나라에 불과했지만, 17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강대국 지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양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는 목초지가 이어지던 섬나라. 그런 영국이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세계의 공장으로 발돋움하기까지 이 같은 극적 변신의 무대가 템스강이었다.

아일랜드 출신 화가 제임스 베리의 ‘상업 또는 템스강의 승리’(1777∼1784년).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 ‘템스강의 신(Father Thames)’이다. 이 작품은 현재 영국 왕립미술협회 대회의실 내 베리의 벽화 시리즈 ‘인류 문화의 진보’에 포함돼 있다(아래 사진). 사진 출처 왕립미술협회

아일랜드 출신 화가 제임스 베리의 ‘상업 또는 템스강의 승리’(1777∼1784년).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 ‘템스강의 신(Father Thames)’이다. 이 작품은 현재 영국 왕립미술협회 대회의실 내 베리의 벽화 시리즈 ‘인류 문화의 진보’에 포함돼 있다(아래 사진). 사진 출처 왕립미술협회
템스강을 영국이 이뤄낸 부의 원천으로 예찬한 그림이 있다. 아일랜드 출신 화가 제임스 베리가 1784년 완성한 ‘상업 또는 템스강의 승리’라는 작품이다. 베리가 런던에 있는 왕립미술협회 대회의실에 그린 ‘인류 문화의 진보(The Progress of Human Culture)’ 시리즈 중 네 번째 그림이다. 베리는 인류 역사를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 여섯 점의 대형 벽화를 그렸다. 그는 인류 문명의 시작을 고대 그리스와 로마로 잡고 이를 주제로 세 점의 그림을 그린 뒤 18세기 당시의 문명 단계를 보여주기 위해 ‘상업 또는 템스강의 승리’를 제작했다. 이 그림은 세계 문명의 중심이 그리스, 로마에서 시작해 이제는 템스강으로 왔다고 선언하고 있는 셈이다.

그림을 보면 한가운데 비스듬이 기대어 앉아 있는 인물이 ‘템스강의 신(Father Thames)’이다. 그는 오른손에 노를 잡고, 왼손에는 나침반을 들고 있다. 노가 항해를 상징한다면, 나침반은 이성을 상징한다. 템스강의 신 위에는 ‘상업의 신’ 머큐리가 자리한다. 이어 템스강의 신을 프랜시스 드레이크, 월터 롤리, 제임스 쿡 등 영국이 배출한 탐험가와 항해사들이 받들고 있다. 주변에는 ‘바다의 요정’ 네레이드도 배치돼 있다. 하나의 그림 속에 신화적 인물과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인물이 함께 등장하고 있어 흥미롭다. 이는 자신들의 역사가 언제가 신격화되기를 기대하며 그렸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림의 왼쪽에는 세계 각지의 인물들이 템스강의 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유럽은 포도를, 아시아는 비단을, 아메리카는 모피를, 그리고 아프리카는 쇠사슬에 묶인 노예의 형상으로 등장한다. 유럽의 상품은 풍요를, 아시아는 사치와 아름다움을, 아메리카는 야생성과 교역의 가능성을, 아프리카는 노예 무역의 현실을 상징한다. 당시 영국 무역의 실상인 식민지, 삼각무역, 노예제를 고전적 알레고리로 압축하고 있다.

영국 왕립미술협회 건물 정면 대리석 명판에는 ‘미술과 상업을 증진한다(Art and Commerce Promoted·점선 안)’라고 쓰여 있다. 사진 출처 왕립미술협회

영국 왕립미술협회 건물 정면 대리석 명판에는 ‘미술과 상업을 증진한다(Art and Commerce Promoted·점선 안)’라고 쓰여 있다. 사진 출처 왕립미술협회
이 그림이 자리한 공간은 현재 왕립미술협회라고 불리지만, 1754년 설립 당시에는 ‘미술과 상공업 진흥협회(Society for the Encouragement of Arts, Manufactures and Commerce)’였다. 미술, 상업, 공업을 한데 묶어 진흥하는 단체라니 다소 의아할 수 있다. 하지만 산업혁명이 움트던 당시 상황을 상상해 보자. 이 시기 미술은 단순한 미적 감상에 그치지 않고 상공업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다.

예를 들어 도자기, 직물, 공예의 도안이 화가들의 손에서 나왔고 증기기관이나 공장, 선박의 설계도면 역시 화가의 손을 거쳐야 했다. 다시 말해 18세기 미술은 상업과 생산 활동의 기본 토대가 됐다. 그렇다면 이 세 분야를 함께 진흥하겠다는 발상은 시대의 현실적 요청이었다. 이 단체의 설립을 주도한 윌리엄 시플리는 “기업을 발전시키고, 과학을 진흥하며, 미술을 개선하고 제조업을 향상시키며, 상거래를 확장할 관대한 열정적인 사람들의 단체”로 역할을 정의했다.

설립 당시 이 협회는 인류 문명의 단계까지 고민할 정도로 나름의 철학적인 단체였다. 베리가 그린 ‘상업 또는 템스강의 승리’는 다가올 19세기 영국의 번영을 예견하고, 그 번영의 중심에 템스강이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6·25전쟁 이후 한국이 이뤄낸 눈부신 경제 부흥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이 도전은 여전히 진행형이라고 생각한다. 베리의 ‘상업 또는 템스강의 승리’처럼, 한국의 경제적 번영과 인류 문명에 대한 한국적 공헌을 고민한 그림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이런 작품을 ‘미술과 경제’라는 주제를 다루는 본칼럼에서 살펴보게 된다면 그 의미가 더욱 깊을 것 같아 앞으로 꼭 다뤄보고 싶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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