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조은아]트럼프 압박에 국방비 늘린 유럽의 딜레마

7 hours ago 2

조은아 파리 특파원

조은아 파리 특파원
지난주 유럽은 ‘아빠와 아들’ 논란으로 한바탕 시끄러웠다. 25일(현지 시간) 마르크 뤼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무총장이 미국을 ‘아빠’로 비유했기 때문이다. 그는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쟁 중인 이스라엘과 이란을 ‘학교 운동장에서 싸우는 아이들’이라고 말하자 “아빠(Daddy)는 때로 강한 언어를 써야 할 때도 있다”고 맞장구쳤다. 유럽에선 “아첨이 지나치다”, “자존심 상한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유럽의 미국 비위 맞추기는 말뿐이 아니었다. 나토 회원국 32개국은 정상회의 뒤 ‘2035년까지 국방비를 국내총생산(GDP)의 5% 수준으로 늘리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나토 탈퇴 가능성을 시사하며 국방비 증액을 압박할 때 내놓은 수치다. 유럽은 결국 ‘아빠’ 말씀 잘 듣는 ‘아이’처럼 즉각 움직인 모양새가 됐다.

트럼프 압박에 ‘지키지 못할 약속’

국방비 증액 선언 뒤, 유럽 국가들의 속내가 매우 복잡해졌다. 적지 않은 국가들이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한 셈이 됐기 때문이다. 국가 부채가 너무 심각해 국방비를 목표대로 늘리기 힘들다는 진단이 많다. 유럽연합(EU)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유로존(유로화 사용 20개국)의 국가 부채는 평균 87.4%다. ‘5%’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회원국은 독일, 폴란드와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스칸디나비아 국가(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뿐이라는 연구기관의 분석도 나왔다.

한정된 예산에서 국방비를 늘려야 하니 다른 부분 예산이 줄 수밖에 없다. 자주 타깃이 되는 분야는 복지다. 이 때문에 ‘유럽은 이제 복지(welfare) 국가가 아닌 전쟁(warfare) 국가’라는 말도 나온다. 복지예산 감축도 만만치 않은 문제다. 유럽은 이민 증가와 출산 장려 정책으로 고령화 문제를 극복한 사례로 꼽히지만 여전히 고령 인구 비중이 높다. EU 인구에서 65세 이상 노령층의 비율은 지난해 21.6%로, 10년 전에 비해 2.9%포인트 늘었다.

‘나라 살림을 아껴 쓰자’고 말하긴 쉽지만 실제 집행하긴 현실적으로 어렵다. 재정 긴축 시도는 국민적 불만과 정치적 분열을 일으켜 행정부 공백 사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프랑스에선 지난해 12월 당시 미셸 바르니에 총리가 600억 유로(약 96조 원)를 절감하는 예산안을 제출했다. 결국 야당의 거센 반발로 임명 석 달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고, 내각이 62년 만에 붕괴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韓, 유럽 보며 안심할 순 없어

지출 분야를 조정하기도, 지출 총액을 줄이기도 어렵다 보니 결국 지출 자체를 늘릴 수밖에 없다는 공감대가 생겨났다. 이탈리아 등 일부 국가들은 EU 집행위원회에 회원국별 부채 한도를 제한하는 ‘재정 준칙’을 조정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집행위는 국방 지출만 예외적으로 규제를 풀어주는 ‘유럽 재무장 정책’을 내놨다. 결국 부채를 늘릴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렇게 부채가 늘면 장기적으로 정부가 돈을 쓰기 더 힘들어 경제 활력 역시 더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안 그래도 심각한 경제 침체가 더 악화될 수 있는 것이다. 유럽 국가들은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이 됐다. 한국은 유럽에 비해 GDP 대비 국가 부채 비율이 낮으니 적극적으로 재정을 써도 된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지금처럼 경제가 힘든 시기엔 정부의 지출이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재정 지출이 효율적인지, 잘못 지출되는 구멍은 없는지는 더욱 꼼꼼히 따져봐야 할 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저출산도, 노인빈곤율도 1위인 한국의 부채 증가 속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제기되고 있다. 유럽보다 낫다고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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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아 파리 특파원 ac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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