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정치 논리에 밀린 뉴욕 혼잡통행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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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시 지하철을 타다 보면 스마트폰이 먹통이 되는 일이 종종 있다. 34번가에 있는 펜스테이션 인근, 맨해튼과 브루클린 사이에 있는 이스트강 밑을 지나갈 때 등이다. 스마트폰이 안 터질 때 지하철이 역과 역 사이에서 멈추는 경우도 적지 않다. 기자도 뉴욕으로 들어가는 지하철을 탔다가 약속 시간이 이미 지나버렸는데 그 사람에게 연락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른 적이 많았다.

범죄 잇따르는 뉴욕 지하철

[특파원 칼럼] 정치 논리에 밀린 뉴욕 혼잡통행료

스마트폰 신호가 안 잡히는 정도라면 그나마 사소한 일이겠지만 사실 뉴욕 지하철의 문제는 더 심각하다. 한국에선 이제 너무나 당연한 스크린도어가 뉴욕 지하철역엔 대부분 설치돼 있지 않다. 한 발짝만 잘못 디디면 선로로 떨어질 수 있는데 출퇴근 시간엔 승강장에 빼곡히 사람이 차 있는 경우가 흔하다. 엽기 범죄도 잊을 만하면 일어난다. 작년 말 한 남성이 코니아일랜드스틸웰애비뉴역에 정차 중이던 지하철 객차에서 졸고 있던 여성 몸에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 황당한 사건이 있었다. 맨해튼 일대 지하철역에선 한 남성이 열차를 기다리던 다른 남성을 선로로 밀치는 사고도 일어났다. 뉴욕 지하철엔 노숙자, 마약에 취한 것처럼 보이는 이도 적지 않다.

세계의 경제 수도라는 뉴욕 지하철에서 이런 아찔한 일이 벌어지는 건 뉴욕 대중교통당국(MTA)의 재정난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스크린도어, CCTV, 안전요원을 갖추면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데 MTA는 그럴 돈이 없기 때문이다. MTA는 작년 9월 기준으로 부채가 470억달러(약 67조원)에 달한다. 불법 무임승차가 만연한데도 이를 방치한 데다 코로나19 기간 대중교통 이용객이 급감해 재정난이 커졌다. 문제가 심각해지자 뉴욕주 정부와 MTA는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대책을 내놨는데, 요금을 인상하는 것이 아니라 올해 1월부터 맨해튼 60번가 이남 지역으로 들어오는 차량에 혼잡통행료를 부과하겠다는 것이었다. 혼잡통행료는 승용차 기준으로 최대 9달러가 매겨졌다.

여론 눈치만 보는 정치인들

그러자 이번엔 시민이 반발했다. 재정난을 해결하려면 지하철 요금을 올려야 하는데 엉뚱하게 차량 이용객에게 부담을 지운다는 비난이 거세졌다. 주 정부끼리도 갈등이 불거졌다. 혼잡통행료를 내야 하는 이들 상당수가 뉴욕 인근의 뉴저지주나 코네티컷주에서 맨해튼으로 통근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뉴욕 시민 표심을 의식해 다른 주에 부담을 떠넘겼다는 비판이 나왔다.

그러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지난 19일 느닷없이 뉴욕시 혼잡통행료 정책을 철회하도록 했다. 혼잡통행료를 부과하려면 연방정부 승인을 받아야하는데 이를 거부한 것이다. 그러면서 왕관을 쓴 자신의 모습을 SNS에 올리며 ‘국왕 만세’라고 적었다. 하지만 구멍 난 재정을 어떻게 메울지, 뉴욕 지하철 치안은 어떻게 할지에 관해선 일언반구도 없었다. 뉴욕주와 MTA는 즉각 소송을 내겠다고 맞섰다. 요금 인상이라는 정공법을 피하다보니 뉴욕 교통당국이나 연방정부가 발표하는 정책마다 갈등이 불거지는 꼴이다. 정치인이 눈앞의 인기에만 급급해 내놓는 정책이 빚어내는 혼란은 어디서나 비슷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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