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신진우]B-2 폭격기와 낡은 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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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우 워싱턴 특파원

신진우 워싱턴 특파원
“주권국가들로 구성된 국제사회에서 합의는 모든 당사자가 그것이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생각할 때만 유지될 수 있다.”

미국 현실주의 외교의 거장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저서 ‘격변의 시절(Years of Upheaval)’에서 외교의 본질을 이렇게 설명했다. 외교의 성패는 상대를 얼마나 빨리 굴복시키느냐가 아닌, 시간이 흘러도 유지 가능한 합의 구조를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하느냐에 달려 있단 의미다. 화려한 순간보다 중요한 건 그 이후다. 극적인 장면이 일회성 이벤트로 끝날지, 지속 가능한 질서로 이어질진 결국 관리와 조율의 능력이 결정한다고 키신저는 설명했다.

화려한 등장, 출구 없는 공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외교는 그런 점에서 키신저의 외교 문법과는 다른 궤적을 그려왔다. 그는 합의가 오래 지속될 구조를 만드는 것보다 초반에 상대를 움직이고 판세를 뒤집는 데 초점을 맞춘다.

국제 현안을 다룰 때마다 그의 등장은 늘 화려했다.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 앞에서도 특유의 직설적인 화법으로 단숨에 해결할 수 있단 자신감을 내비쳤다. 기존 정치인들이 수개월, 때로는 수년에 걸쳐 접근하는 사안도 그는 며칠 만에 세계 뉴스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선 과정에서 내세운 “취임 후 24시간 이내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 공약이다. 지난해 취임 직후 그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정상과 잇달아 접촉하며 종전이 임박한 듯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도 전쟁의 끝을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이질적인 전략 목표, 유럽 국가들의 이해관계, 안보 질서 재편이란 복잡한 현실만 남아 있다. 또 양측 간의 군사적 충돌은 계속되고 있다.

최근 이란 문제 역시 비슷한 흐름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강력한 군사 압박을 통해 이란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에 남은 건 제재 해제, 핵 프로그램 제한, 역내 세력 균형, 동맹국들의 우려 등 복잡한 난제들이다. ‘관리의 기술’ 입증 못한 트럼프

트럼프 대통령 집권 1기 당시 북-미 정상회담 역시 용두사미 외교로 평가된다. 현직 미 대통령과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처음 마주 앉는단 사실에 당시 세계는 한반도 평화의 전환점을 기대했다. 하지만 결과는 하노이 ‘노딜’이었다. 비핵화와 제재 완화를 둘러싼 구체적인 로드맵, 이를 실행할 상호 신뢰가 뒷받침되지 못하면서 역사적 장면은 지속 가능한 합의로 이어지지 못했다.

부동산 개발업자 출신인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을 뛰어난 협상가라고 강조한다. 실제로 그는 협상력을 극대화해 상대를 압박하고 유리한 조건을 끌어내는 데 능숙하단 평가도 받았다. 다만 외교는 부동산 계약과 다르다. 계약서는 서명하는 순간 끝나지만, 외교는 그때부터 시작이다.

국제정치는 승자독식의 게임이 아니다. 상대방이 완전히 패배했다고 느끼는 순간, 합의는 오히려 흔들릴지 모른다. 세부 조항을 조정하는 기술, 이해관계를 관리하는 인내, 상대가 합의를 자신의 성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드는 정치적 여유가 외교에 필수인 건 그래서다.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의 시작에선 번뜩이는 순발력을 보여줬지만, 이후 관리 능력은 아직 충분히 입증하지 못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백악관 집무실 책상 위엔 지난해 6월 이란 핵시설 3곳을 타격한 ‘B-2 폭격기’ 모형이 놓여 있다. 그는 그 모형을 바라보며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전략적 우위를 확보했던 짜릿한 순간을 흐뭇하게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지금 필요한 건 ‘외교관의 낡은 수첩’일지 모른다.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를 차근차근 풀고, 상대 국가들을 같은 테이블에 붙들어 두며, 합의가 무너지지 않도록 끈질기게 관리하기 위해 꺼내 볼 그만의 메모가 필요하단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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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우 워싱턴 특파원 nice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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