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미국은 워라밸이 좋을 것이란 허상

5 days ago 4

[특파원 칼럼] 미국은 워라밸이 좋을 것이란 허상

미국에 있는 특파원에게 저녁 자리는 부담일 때가 많다. 지구 반대편 한국 시간에 맞춰 기사를 써야 해서다. 반주(飯酒)는 고사하고 일찍 자리를 떠야 할 때도 부지기수여서 언젠가부터 저녁 자리는 피하게 된다. 하지만 빅테크 엔지니어와 식사할 땐 마음이 편하다. 그들 역시 식사 후 사무실을 다시 찾기 때문이다. 야근뿐 아니라 주말 근무도 일상이다. 약간의 동질감에 신세 한탄이나 함께 할까 하는 마음에 한번은 이렇게 물었다. “직장 상사가 일을 너무 많이 주는 것 아니냐”. 그랬더니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내 선택인데 무슨 불만이 있겠어요.”

"야근도 내 선택"

‘인공지능(AI) 붐’으로 미국 빅테크의 몸값이 치솟으며 실리콘밸리는 때때로 국내 직장인 사이에서 동경의 대상이 되곤 한다. 연중 맑고 온화한 날씨, 최대 수십만달러에 달하는 연봉, 세계 최고 수준으로 꼽히는 자녀 교육 환경 등 이유는 다양하다. 하지만 가끔 한국에서 온 출장자에게서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찾아 실리콘밸리에서 일하고 싶다는 말을 들을 때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실리콘밸리에서 워라밸은 많은 이에게 당연히 주어지는 권리라기보다 ‘선택’에 가깝다.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5시에 퇴근하는 사람도 있고, 재택근무를 주로 하며 1년에 회사를 찾는 날이 손에 꼽는 사람도 있지만 이들의 머릿속엔 한 가지가 공통으로 자리 잡고 있다. 바로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공포다. 잊을 만하면 실리콘밸리를 덮치는 정리해고 폭풍에 업무 성과는 곧 고용 안정성과 동의어가 됐다.

회사의 발전이 내 자산 가치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도 초과 근로 수용성을 높인다. 이곳에선 빅테크와 스타트업 할 것 없이 연봉 계약을 할 때 일부를 스톡옵션(주식 매수 청구권)으로 받는 게 일반적이다. 열심히 일해야 주가가 오르는 건 물론이고 업무 성과에 따라 받는 스톡옵션 양도 달라진다.

열심히 일할수록 손해 보는 韓

벤처캐피털(VC)을 중심으로 비상장 스타트업 스톡옵션을 거래하는 세컨더리 마켓의 규모도 상당하다. 미국 내 이 같은 세컨더리 마켓의 거래 규모는 지난해 1400억달러로 10년 전(160억달러)과 비교해 아홉 배가량 불어났다. 끊임없이 스톡옵션을 팔아 억만장자가 된 동료를 지켜본 이들은 “다음은 내 차례”라는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한국의 기업 문화는 정반대다. 웬만해선 잘리지 않는 높은 고용 안정성은 “나만 아니면 된다”는 수많은 ‘빌런’을 양산한다. 어느새 널리 퍼진 ‘누칼협’(누가 칼 들고 협박했냐)과 ‘알빠노’(내가 알 바인가) 등 신조어로 대표되는 문화는 빌런의 자양분이 됐다. 여기에 업무 성과와 상관없이 연차순으로 높은 직급과 높은 연봉을 보장하는 호봉제, 업종별 다양성과 특수성을 무시하고 일괄적으로 적용하는 주 52시간제는 더 많이 일할수록 손해 보는 K 기업 문화를 만들어 냈다.

실리콘밸리는 글로벌 AI 패권 전쟁의 최전선이다. 그런데 전쟁통에서 바라본 한국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총알이 빗발치는데 AI 패권 경쟁에 대비한답시고 국회에서는 주 52시간제 적용을 누구에게만 빼줄지 자구(字句)를 두고 다투고 있다. 빌런들이 따로 없다.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