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더 단단히 밀착하는 일본을 보면서 한 과학자가 떠올랐다. 일본 현대 과학기술의 아버지인 니시나 요시오 박사(1890~1951)다. 일본 최초의 노벨과학상 수상자인 유카와 히데키, 두 번째 수상자인 도모나가 신이치로가 그의 제자다.
니시나는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리켄(RIKEN:이화학연구소)의 위상을 20세기 초 정립했다. 지금은 미국에 밀려났지만 2000년대 들어 계산 속도 세계 1위를 두 번이나 석권한 슈퍼컴퓨터 후가쿠를 개발한 곳이 리켄이다. 니시나는 양자역학 연구를 리켄에서 일본 최초로 시작했다. 그가 영국 노벨과학상의 산실인 캐번디시 연구소를 방문했을 때 양자역학 창시자 닐스 보어를 만난 게 계기가 됐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천재 수학자 폴 디랙 등이 1920년대 일본을 찾은 것도 니시나 박사의 글로벌 인맥 덕이었다. 일제강점기 초입 주권을 잃은 조선이 절규하던 바로 그때 일본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핵폭탄 원리 연구시설인 입자가속기를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낸 것도 니시나다. 그는 리켄에서 비밀리에 핵폭탄 제조에 매달렸다. 미국이 2차 세계대전을 끝낸 후 일본에 진입해 가장 먼저 한 일이 니시나가 개발한 일본 내 가속기 5개를 찾아 전부 파괴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보다 일본이 한발 먼저 핵폭탄 개발에 성공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태평양전쟁에서 미국과 건곤일척으로 싸운 일본은 같은 시기 기술 패권 전쟁에서도 그에 못지않게 맞섰다.
일본 JAXA도 리켄 못지않은 연구소다. 인공위성은 고도가 낮아질수록 임무 수행이 어렵다. 중력을 못 이겨내 떨어지기 때문이다. 지구 상공 200㎞에서 위성 수명은 하루밖에 안 된다. 400㎞는 1년, 500㎞는 10년까지 간다. JAXA는 2017년께 고도 180㎞에서 위성을 운용할 수 있는 혁신적인 이온추력기를 개발했다. 지난해 4월 미·일 정상회담 때 언급한 양국 간 우주 방위산업 협력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일본 대표 연구소다. 미국은 당시 회담에서 일본이 미국 다음으로 달에 발자국을 찍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치켜세웠다.
글로벌 최고 수준의 연구를 한다면 리켄이나 JAXA 정도의 외국 연구소와 구속력 있는 협약 정도는 맺는 게 상식적이다. 한국 과학기술 연구소들은 이런 상식과 배치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밑에서 2500억원에 가까운 예산을 타가며 연구소 23개를 관리하는 중간 조직으로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란 곳이 있다. NST는 작년 ‘글로벌 톱(TOP) 전략연구단’ 5개를 선정했다. 기존에 연구소 몇 개를 모아 하던 ‘융합연구단’ 사업을 이름만 바꿨다. 전형적인 표지갈이 사업이다. 2029년까지 이 표지갈이 사업에 4825억원을 지원한다. 그렇다면 기존에 수백억원을 지원하는 융합연구단을 정리하는 게 합리적이지만 이 역시 살아남았다.
우물 안 개구리인 국내 연구소들을 보면 지금 한국의 처지가 오버랩된다. 미국이 짜고 있는 새 국제질서에서 각국이 살아남기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지만 한국만 외딴섬처럼 고립돼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일본을 최고로 대우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미국 못지않게 축적한 과학기술을 향한 존중과 확고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연대의식 때문이다. 현실적으로는 재정적 연대도 한몫한다. 표면으로 드러나는 방위비 분담금 외에도 일본이 미국에 지급하는 비닉 무기(비밀 무기) 구매비는 한국의 2~3배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올해 국방 예산 약 61조원 가운데 대부분 무기 구매로 구성된 방위력 개선비는 약 18조원. 일본이 미국에 얼마나 많은 돈을 보내는지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남부의 백악관으로 불리는 플로리다 마러라고 자택에서 트럼프가 손 마사요시(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을 불러 5000억달러짜리 인공지능(AI) 프로젝트를 발표한 것도 이런 배경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AI와 양자, 우주항공, 에너지 등 모든 미래 산업에서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에 대항할 카드로 일본과 과학기술 협력을 꼽는 전문가가 많다. 유상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도 그들 중 하나다. 마침 유 장관이 곧 일본을 방문해 양국 정부가 함께 운영하는 기술 거래 플랫폼을 만들자고 제안할 계획이라고 한다. 당연히 리켄도 방문 대상지에 포함됐다. 안보뿐만 아니라 기술 패권 전쟁에서도 북·중·러에 맞설 힘은 한·미·일 협력에서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