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여행과 ‘비틀’이 세상의 빛 본 연유… 나치의 ‘환심정책’[권오상의 전쟁으로 읽는 경제]

1 week ago 3

나치 프로젝트의 모순적
히틀러 “우리 시대 천재” 칭한 라이… 노동자층 환심 사는 프로젝트 벌여
크루즈여행 창시-해양리조트 구상… 누구나 살 수 있는 ‘국민차’ 생산도
2차 대전에 크루즈선은 병원선으로… 어뢰 맞아 최대 인명피해 낸 선박 돼

독일노동전선의 수장이었던 로베르트 라이.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독일노동전선의 수장이었던 로베르트 라이.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1945년 1월 30일, 빌헬름 구스틀로프는 폴란드 항구 그디니아를 출항했다. 빌헬름 구스틀로프는 ‘작전 한니발’에 동원된 독일의 2만5000t급 여객선이었다. 작전 한니발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을 목전에 둔 독일이 동프로이센과 발트해 3국, 즉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 있던 군인과 민간인을 배로 독일 본토로 후송하는 작전이었다. 빌헬름 구스틀로프는 로베르트 라이의 자랑이자 자부심이었다. 1890년생인 라이는 제1차 세계대전 때인 1917년 항공 정찰 임무 도중 탑승한 정찰기가 추락해 프랑스군의 포로가 됐다. 추락 때 뇌를 다친 탓에 라이는 종종 걷잡을 수 없는 폭력적 성향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종전 후인 1920년 독일 뮌스터대에서 화학 박사학위를 받고 독일 종합화학공업 회사 이게파르벤에 취직했다.》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전쟁의 경제학’ 저자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전쟁의 경제학’ 저자
괴벽하고 늘 술에 취해 있는 라이를 긍정적으로 본 사람이 있었다. 나치당의 수장인 아돌프 히틀러였다. 히틀러는 1933년 나치당에서 총통 바로 밑의 계급인 라이히스라이터로 라이를 임명했다. 역대 22명에게만 허용된 계급인 라이히스라이터 중에는 총통보 루돌프 헤스, 친위대와 비밀경찰 수장인 하인리히 힘러,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 등이 있었다.

히틀러가 라이에게 준 지위는 관제 독일노동조합총연맹이라 할 수 있는 독일노동전선의 수장이었다. 히틀러를 향한 충성심이 열렬했던 라이는 노조의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향상 요구를 묵살했다.

라이는 한 가지 생각이 더 있었다. 힘으로 누르기만 해선 언젠가 불만이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라이는 독일노동전선 산하에 크라프트 두르히 프로이데, 두문자어로 ‘카데에프(KdF)’라는 조직을 신설했다. 아우디의 모토가 ‘기술을 통한 진보’라면 카데에프는 ‘기쁨을 통한 힘’이었다.

나치당의 노동자 기관인 독일노동전선 산하 카데에프(KdF)는 독일인에게 관제 여가와 휴양 제공을 목표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카데에프가 제작한 지중해 여행 크루즈선으로, 로베르트 라이는 이 크루즈선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나치당의 노동자 기관인 독일노동전선 산하 카데에프(KdF)는 독일인에게 관제 여가와 휴양 제공을 목표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카데에프가 제작한 지중해 여행 크루즈선으로, 로베르트 라이는 이 크루즈선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카데에프는 독일인들에게 관제 여가와 휴양을 제공해 주는 걸 목표로 삼았다. 카데에프의 첫 번째 프로젝트는 지중해 크루즈 여행이었다. 그때까지 대중을 대상으로 한 크루즈선은 존재하지 않았다. 빌헬름 구스틀로프는 카데에프 크루즈 선대의 기함(함대나 전대에서 사령관이 타고 있는 배)이었다. 그 선박명은 1936년 유대인에게 암살된 스위스 나치당의 수장 이름을 딴 것이었다. 라이는 카데에프의 두 번째 크루즈선에는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말하자면 라이는 오늘날 크루즈 여행의 창시자였다.

카데에프의 사업은 크루즈 여행이 전부가 아니었다. 카데에프가 제공하는 여행 패키지를 이용한 독일인 수는 1934년 40만 명에서 1937년 170만 명으로 늘었다. 카데에프를 통해 700만 명이 주말 여행을 다녀오고 160만 명이 당일치기 하이킹을 즐겼다. 또한 공장을 찾아가 콘서트와 오페라 공연을 열고 무료 운동교실도 운영했다.

독일인들은 카데에프가 제공하는 여행 프로그램을 좋아했다. 가격 경쟁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카데에프는 돈을 벌려고 여행 프로그램을 내놓은 게 아니었다. 고대 로마가 시민의 환심을 사고자 무료로 빵을 배급하고 원형 경기장에서 병거 경주와 검투사 대결을 공짜로 보여줬던 것과 같은 심산이었다.

패키지 여행을 주관하는 카데에프가 새로운 리조트 건설을 구상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히틀러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라이는 발트해에 면한 섬 뤼겐에 ‘프로라의 거대한 석상’, 짧게 줄여 프로라로 알려진 리조트를 1936년부터 짓기 시작했다. 1층부터 6층까지 프로라의 모든 객실은 바다를 향하도록 디자인됐다. 프로라의 놀라운 점은 그 규모였다. 프로라에는 여덟 개의 객실 건물이 해안가를 따라 일렬로 지어질 계획이었다. 그 전체 길이는 약 5km였고 객실 수는 1만 개였다. 즉, 프로라는 2만 명이 동시에 휴양을 즐길 수 있는 리조트였다. 또한 2만 명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는 초대형 콘서트홀도 짓도록 설계됐다. 프로라의 건축 디자인은 1937년 파리 국제박람회에서 그랑프리상을 받았다. 하지만 프로라는 3분의 2 정도 지어진 상태에서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건설이 중단됐다. 만약 2차 대전이 조금 더 늦게 시작됐다면 프로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리조트가 됐을 터였다.

1939년 카데에프의 ‘폴크스바겐’ 광고 ‘강둑에서의 휴식’ 이미지.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1939년 카데에프의 ‘폴크스바겐’ 광고 ‘강둑에서의 휴식’ 이미지.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라이가 맡은 일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라이는 히틀러가 무엇보다 큰 관심을 쏟은 프로젝트도 책임졌다. 바로 독일 국민차, ‘폴크스바겐(Volkswagen)’의 생산이었다.

1933년 히틀러가 독일 총리가 되었을 때 독일에는 이미 세계 유수의 자동차 회사가 여럿 있었다. 1932년 아우디와 호르히 등 네 개 자동차 회사가 합병해 생긴 ‘아우토우니온’과 1926년 다임러와 벤츠가 합병해 생긴 ‘다임러벤츠’가 대표적이었다. 아우토우니온과 다임러벤츠는 1934년부터 자동차 경주 대회인 그랑프리에서 알파로메오의 경주차 팀인 스쿠데리아 페라리를 압도했다. 항공기 엔진 회사로 시작해 오토바이 회사로 변신한 바이에른모터공장, 즉 ‘BMW’는 면허 생산으로 1928년에야 자동차를 처음 만든 후발 주자였다.

1934년 5월 히틀러는 독일 국민이라면 누구나 부담 없이 구매할 수 있는 자동차를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성인 두 명과 어린이 세 명이 탈 수 있으면서 동시에 연비는 리터당 14km를 넘어야 한다는 조건도 붙였다.

국민차 개발의 책임은 페르디난트 포르쉐에게 주어졌다. 1875년 오스트리아-헝가리인으로 태어난 포르쉐는 1900년 야코프 로너와 함께 휘발유 엔진과 전기 모터를 결합한 하이브리드차를 세계 최초로 만들었다. 포르쉐 박사라는 호칭을 들어본 사람이 있겠지만 실제로 그는 대학도 마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두 대학에서 명예박사 칭호를 받을 정도로 실력이 있었다.

1935년 포르쉐는 시제차를 완성했다. 당시의 공식 명칭은 그냥 ‘폴크스바겐’, 말하자면 국민차였다. 이 차를 가리키는 ‘비틀’, 즉 딱정벌레라는 이름은 1968년에 붙여졌다. 포르쉐는 뛰어난 엔지니어였지만 흠이 없지는 않았다. 가령 비틀은 체코의 자동차 회사 타트라의 차종 97과 너무나 흡사했다. 타트라 97을 디자인한 한스 레드빈카는 분노하며 포르셰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포르쉐로선 다행하게도 1938년 독일이 체코를 병합했다. 1965년 폴크스바겐 측은 거액을 지불하며 타트라와 합의했다.

시제차는 완성됐지만 폴크스바겐이 세상에 나오는 데에는 진통이 있었다. 기존 자동차 회사인 메르세데스벤츠와 아우토우니온은 히틀러가 원하는 수준의 가격으론 양산이 불가능하다며 태업을 벌였다. 히틀러는 ‘우리 시대의 천재’인 라이에게 일을 맡겼다. 라이의 카데에프는 1938년 국민차 프로젝트를 떠맡아 볼프스부르크에 공장을 지었다. 그게 오늘날 폴크스바겐의 본사 공장이다. 1939년 2차 대전이 시작되면서 볼프스부르크 공장에서 막상 비틀은 거의 생산되지 못하고 비틀을 개조한 퀴벨바겐 같은 군용차만 생산됐다.

크루즈선으로 건조된 빌헬름 구스틀로프도 비슷한 운명이었다. 2차 대전 개전과 동시에 빌헬름 구스틀로프는 병원선으로 개조됐다. 1940년 11월부터는 그디니아에 정박한 채 독일 2유보트훈련사단의 막사로 전용됐다.

1945년 1월 30일 그디니아를 출항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빌헬름 구스틀로프는 소련 잠수함 S-13이 발사한 세 발의 어뢰를 맞았다. 약 50분 후 빌헬름 구스틀로프는 침몰했다. 당시 이 배에는 1만1000명 가까운 사람이 타고 있었다. 독일 해군은 1252명을 구조했지만 9000명이 넘는 사람이 숨졌다. 이는 2025년 현재까지도 역사상 가장 인명 손실이 컸던 해상 사건이다. 타이타닉호와 루시타니아호가 침몰했을 당시 사망자 수는 각각 1517명과 1198명으로, 빌헬름 구스틀로프 침몰 때보다는 적었다.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전쟁의 경제학’ 저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