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가 회사채 시장을 조성하는 게 아니라 왜곡하는 것입니다.”
30년 가까이 채권 업무를 맡아온 증권사 임원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요즘처럼 회사채 시장이 혼탁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증권사들이 회사채 주관 업무를 따내기 위해 일부러 비싼 값에 회사채 인수를 약속하는 일이 올 들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계열 운용사와 보험사 자금을 동원하는 것은 물론이고 발행어음으로 모은 회삿돈까지 쏟아붓는다. 채권 시장 관계자들은 “회사채 수요예측에 참여하는 자금의 80%가 회사채 가격을 부풀리기 위한 증권사의 돈”이라고 앞다퉈 제보했다.
회사채 수요예측에 대한 신뢰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회사채 ‘큰손’ 투자자인 연기금과 운용사는 수요예측 참여를 중단한 지 오래다. 발행 다음 날부터 수요예측 때 정해진 발행 가격보다 떨어진 가격에 회사채가 매물로 대거 나오는 일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운용사 측이 증권사 담당 직원에게 회사채 발행 전에 전화해 “시장에 바로 매도되는 물량이 얼마나 되냐”고 확인하는 경우도 잦아졌다. 투자 기간이 통상 4개월 이상인 회사채 시장에서 하루 만에 매물이 나오는 것은 과거에 없던 현상이다. 사실상 수요예측을 통한 가격 발견 기능이 작동을 멈춘 것이다.
자체적인 자정 작용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준을 넘어섰다는 것이 회사채 시장 참여자 대부분의 생각이다. 작년만 해도 대형 증권사를 통해 이뤄진 수요예측 왜곡 과정에 올 들어서는 중소형 증권사까지 대거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익의 원천인 부동산 금융이 2022년 이후 얼어붙으며 회사채 시장에서 활로를 찾으려는 시도다.
이 같은 시장 왜곡이 더 확산하기 전에 손을 써야 한다. “염가에 회사채를 인수한 증권사들의 평가손실이 아직 발생하지 않은 지금이 골든타임”이라는 말도 나온다. 2022년 말 이후 기준금리가 계속 하락하며 증권사가 의도적으로 낮은 금리에 회사채를 인수해도 평가손실까지는 이어지지 않고 있어서다.
우선 회사채 주관 증권사가 자체적으로 회사채 물량을 얼마만큼 인수했는지 투명하게 공시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회사채 주관사들은 회사채 염가 인수를 확약하고 실행하더라도 시장에서 정확히 이를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회사채 주관사의 인수 금액을 공개하는 게 시장 정화의 첫걸음이다. 증권사는 물론이고 발행 기업도 평판 리스크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대형 증권사가 발행어음을 활용해 회사채 수요예측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는지에 관해 명확한 지침도 필요하다. 회사채 시장을 수년간 지켜만 본 금융감독당국이 이제는 행동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