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규제 푼다던 자율주행 샌드박스, 정작 스타트업은 외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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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규제 푼다던 자율주행 샌드박스, 정작 스타트업은 외면

“외부망과 차단된 공간에서 한시적으로만 영상을 처리해야 하는 제약이 있어 규제샌드박스 신청을 포기했습니다.”

국내 한 유망 자율주행 스타트업 관계자는 원본 영상을 활용할 수 있게 해주는 규제샌드박스를 왜 신청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판단에서다. 12일 현재까지 해당 샌드박스를 신청한 기업은 두 곳으로 모두 대기업 계열사다.

자율주행 기술을 고도화하기 위해선 주행 영상 학습이 필수다. 특히 보행자가 차량을 주시하는 시점과 위치를 파악하면 동작 예측이 가능해져 안전성을 높일 수 있다. 국제전기전자공학자협회(IEEE)는 이 같은 정보를 학습하면 자율주행 차량의 판단 정확도가 최대 17% 향상된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개인정보보호법상 보행자를 모자이크 처리한 비식별 영상만 활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업계 요청에 따라 지난해 1월 정부는 원본 영상을 쓸 수 있는 규제샌드박스를 도입했다. 하지만 단서가 붙었다. 활용 기간은 ‘2+2년’으로 제한하고, 외부망과 차단된 구역에서만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출입 인력에도 제한을 뒀다.

스타트업 관계자들은 형식적 면책에 불과한 또 다른 규제라고 비판한다. 한 연구원은 “대규모 프로젝트는 물론 외부 인공지능(AI) 활용이 불가하고 비식별화 비용 부담도 크다”고 말했다. 또 다른 자율주행 스타트업 관계자는 “제한 구역에서만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어 전국 단위 실증에는 실효성이 없다”며 신청하지 않았다고 했다. 규제샌드박스는 2019년 ‘혁신의 실험장’을 표방하며 도입됐다. 지난달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참여 기업의 72%가 중소기업·스타트업이다.

현재 국회에는 연구개발(R&D) 단계에서 원본 영상 활용을 허용하는 개인정보보호법 개정안 3건이 발의돼 있다. 언제 통과될지 하세월이라는 게 문제다. 한 의원실 관계자는 “SK텔레콤 사태 여파로 통과 여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도 제도 정비에 나서겠다고 했지만, 업계에선 반신반의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한국 자율주행 업계가 여전히 규제에 매여 있는 사이 중국 바이두는 국내 모빌리티 플랫폼과 손잡고 자율주행 택시 시장 진출을 준비 중이다. 바이두의 누적 주행 거리는 1억1000만㎞에 달한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주요 기업은 사업자가 책임지는 조건 아래 원본 데이터를 자유롭게 활용하며 기술 효용성을 높인다.

최근 국무조정실은 광역지방자치단체 단위로 자율주행 규제 완화와 인프라 지원을 묶은 ‘메가샌드박스’ 필요성을 언급했다. ‘혁신의 문’을 열겠다고 도입된 제도가 이번만큼은 제 역할을 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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