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철의 자본시장 직설 ] 공멸 자초하는 수수료 치킨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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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SGI서울보증이 주관사 선정 절차에 나설 당시 대다수 증권사 기업공개(IPO) 담당자는 고민에 빠졌다. 조 단위 대어인 데다 수년 만에 등장한 공기업 IPO인 만큼 상징성과 주관 실적 측면에서 매력적이었다. 그렇다고 내키는 딜은 아니었다. 공기업의 ‘짠물 수수료’를 잘 아는 터여서 고생만 하고 돈은 못 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실적쌓기용 출혈 경쟁

[최석철의 자본시장 직설 ] 공멸 자초하는 수수료 치킨게임

일부 증권사는 절대로 저가 수수료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며 다짐했다. 하지만 역시나였다. IPO 공모를 마무리한 뒤 SGI서울보증이 대표 주관사 두 곳에 지급한 최종 수수료는 약 8억원에 불과했다. 공모금액의 0.45%다. 한 차례 상장 실패 등을 겪으며 2년 넘게 인력 수십 명이 달라붙은 걸 감안하면 인건비도 건지기 쉽지 않다.

통상 대어급 IPO 기업이 지급하는 수수료율은 공모금액의 1.0~1.5%에서 책정된다. 성과 보수를 받으면 추가 이익도 기대할 수 있다. SGI서울보증이 낸 수수료는 3분의 1 수준에 그친다. 계약 당시 별도 성과 보수도 없었다.

SGI서울보증 사옥. /한경DB

SGI서울보증 사옥. /한경DB

그나마 과거 공기업 IPO와 비교하면 높은 수준이었다는 게 주관사의 위안거리다. 2017년 상장을 추진하던 한국동서발전, 한국남동발전 등은 주관사단에 공모금액의 0.2~0.3% 수수료율을 제시해 덤핑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공기업은 입찰공고를 내고 절차에 따라 주관사를 선정한다. 평가 기준에 수수료 항목이 있는데 국민의 세금이란 이유로 최저 수수료를 제시하면 상당한 가산점을 준다. 사실상 상장 청사진 등 프레젠테이션이나 주관 능력보다 수수료에서 낙찰 여부가 갈린다. SGI서울보증 입찰도 마찬가지였다.

수수료 덤핑은 IPO 시장뿐 아니라 자본시장 전반에 퍼진 관행이다. 지난해 말 주택도시보증공사(HUG)는 리츠 네 곳 회사채 발행을 위해 증권사에 지급하는 인수 수수료로 단돈 100만원을 냈다. 증권사들이 주관 경쟁에서 이기려고 서로 낮은 수수료를 제시한 결과다.

민간 대기업을 상대로도 증권사는 정당한 보수를 받을 생각을 안 한다. 대형 증권사는 리그테이블 실적을 쌓기 위해, 중소형 증권사는 신규 거래를 따내기 위해 적은 수수료를 제시하는 ‘제 살 깎기’ 경쟁을 받아들이고 있다.

회사채 시장에서는 수수료 덤핑을 넘어 증권사 자금을 직접 태워 기업이 원하는 발행금리를 맞춰 주는 일까지 벌어진다. 주관사 ‘치킨게임’이 시장 왜곡을 불러오자 금융당국이 조사에 나섰다.

저가 수수료 경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증권사는 기업이 정당한 서비스 가격을 내지 않으려 한다며 불만을 토로한다. 주관사에 선정되지 못하면 수익을 낼 수 없다 보니 울며 겨자 먹기로 박리다매 전략을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가치를 깎는 건 공멸의 길을 선택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자조 섞인 평가도 나온다. 부실 실사 등 주관 업무 오류로 귀결될 때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수수료가 박할수록 대가를 얻기 위해 기업 가치를 부풀리거나 무리하게 상장을 추진할 유인도 존재한다.

차별화 노력 없으면 전멸

주관 증권사는 자본시장의 문지기로 불린다. 상장하려는 기업이나 채권을 발행하려는 회사를 가장 먼저 파악해 그럴 자격이 있는지 검토하고 투자자를 연결해 준다. 금융당국이 공모 시장 규제를 강화하며 주관사 책임론을 강하게 내세우는 것 역시 이런 이유에서다.

주관사는 과도한 의무만 부과한다며 억울해하지만 저가 수수료 경쟁 속에 문지기 역할을 스스로 포기한 것은 아닌지 돌아볼 때다. 저가 수수료 경쟁을 벌이며 증권사들이 각자 차별화할 수 있는 나름의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은 지도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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