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두머리’는 불구속, ‘종사자’는 구속?
법원 구속 취소도 검찰 항소 포기도
5100만 국민 중 유일-특별한 방어권
이젠 ‘절차’ 아닌 ‘실체’와 ‘승복’ 논해야
‘무죄 추정 원칙’에 따라 피고인에게 충분한 방어권을 보장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다만 어떤 경우에든 법치의 근간에 해당하는, 공정성과 형평성을 해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나오는 것처럼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 식의 뒤틀린 정의(正義)로는 ‘법치’가 유지될 수 없다.
계엄과 관련해서 지금까지 구속 기소된 피고인은 윤 대통령을 빼고 10명이다. 건강이 좋지 않은 조지호 경찰청장만 조건부로 보석을 허가받았고, 나머지는 모두 구치소에 수감된 상태다. 헌정 질서를 통째로 무너뜨릴 수도 있는, 내란죄의 위험성과 중대성에 비춰 볼 때 이들에 대한 ‘구속 재판’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윤 대통령이 풀려남으로써 ‘내란의 종사자’들은 구속 재판을 받고 그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피고인만 불구속 재판을 받는 불공정하고 차별적인 상황이 연출되게 됐다는 점이다.
공정성과 형평성의 문제는 비단 내란 피고인 그룹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이번에 법원이 윤 대통령에 대해 구속 취소 결정을 내리면서 처음으로 꼽은 사유는 ‘검찰의 구속기간 계산 잘못’이다. 구속 전 피의자 심문을 위해 수사 서류가 법원에 있었던 기간을 ‘구속기간’에서 뺄 때 날짜 단위가 아닌 실제 시간 단위로 계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자체가 잘못된 법 해석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더 논란이 될 수밖에 없는 대목은 이 결정이 지금까지의 관행을 180도 뒤집는 결정이라는 점이다. 즉, 기간 계산을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바꾸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지만, 하필 윤 대통령 사례에 이를 처음 적용하는 것은 ‘법불아귀(法不阿貴·법은 권력자나 신분이 귀한 자에게 아부하지 않는다)’의 정신에 심각한 의문부호를 찍는 일이다.
물론 법원이 일부러 특혜를 주기 위해 이런 결정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윤 대통령과 변호인들이 끝없이 공세를 펴 온 공수처의 수사권 행사 절차 및 과정과 관련해서 재판부가 설명자료를 통해 밝힌 내용을 보면 그 나름의 깊은 고민이 배어난다. 재판부는 “윤 대통령 측의 주장과 관련해 공수처법 등 관련 법령에 명확한 규정이 없고, 대법원의 해석이나 판단도 없는 상태”라면서 “이런 논란을 그대로 두고 재판을 진행할 경우 상급심에서 파기 사유나,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재심 사유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의 이런 우려에는 공감이 가는 대목이 적지 않다.
국회는 공수처법을 만들면서 시비와 분쟁이 생길 수 있는 여지를 여기저기에 남겼다. 공수처와 검찰은 수사 초기에는 주도권 경쟁과 공 다툼을 하느라, 기소 임박 단계에서는 우왕좌왕 시간을 끄느라 ‘절차적 시비’의 단초를 제공했다. 여기에 더해 검찰은 항고를 통해 상급 법원의 판단을 받아 볼 수 있는 권리마저 스스로 내팽개쳤다. 과거 기계적, 습관적으로 항소·항고를 하던 검찰의 기세가 유독 윤 대통령 앞에서만 고분고분해졌다. 책임 소재를 떠나, 하나 분명한 사실은 윤 대통령이 ‘내란 우두머리’라는 중대한 혐의를 받으면서도 5100만 우리 국민 중 어느 누구도 누리지 못한 ‘특별한 방어권’을 적용받게 됐다는 사실이다. 과거 어느 정치지도자보다 ‘법치’와 ‘공정’을 소리 높여 강조해 온 윤 대통령이 ‘법아귀(法阿貴)’의 주인공이 된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윤 대통령과 변호인단은 내란죄 수사뿐 아니라 헌재 탄핵 심판 과정에서도 끊임없는 방어권 논란을 제기해 왔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총 11차례의 변론 중 8차례 참석해서 발언했고, 마지막 변론에서는 무제한 최후진술까지 했다. ‘트럼프 태풍’이 코앞에 닥친 상황에서, 인용이든 기각이든, 리더십 공백을 하루속히 메워야 하는 시급성에 비춰 볼 때 변론을 무한정 허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방어권은 충분히 보장되고도 남았다고 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은 더 이상 ‘절차’를 놓고 왈가왈부해선 안 된다. 이제는 ‘실체’를 말할 때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았던 계엄의 진짜 동기는 무엇인지, ‘500명 수거 및 처리’ 등에 대해서는 어디까지 알고 지시했는지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해명할 것은 해명해야 한다. 헌재든 형사재판에서든 어떤 결정이 나와도 수용하고 승복하겠다고 스스로 약속하고, 지지층에도 당부해야 한다. 그것이 5100만분의 1, 특별한 방어권을 누리고 있는 윤 대통령이 마땅히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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