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인사이트부 기자는 자본시장 이슈를 취재한다. 특정 취재처가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아침에 어디로 출근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저금리 시절이던 재작년까진 ‘서울 종로 서린동’이라고 답변했다. 당시 SK그룹 본사 옆 카페로 출근하는 일이 많았다. 다소 과장하자면 SK본사에서 시작해 SK텔레콤과 SK스퀘어가 있는 을지로 T타워 주변을 맴돌다 보면 하루가 끝났다. 인수합병(M&A) ‘큰손’ SK그룹에 선을 대보려는 사모펀드(PEF), 투자은행(IB), 회계법인 사람들로 북적이다 보니 귀만 세우고 있어도 기삿거리가 쏟아졌다.
얼마 전부턴 동선 변경이 불가피해졌다. SK그룹이 사실상 자본시장 종사자들의 전면 출입 금지를 선언한 여파다. SK그룹은 자본시장과 선을 그었다. 지난해 말 인사에서도 그간 승승장구하던 ‘전략·해외IB·MBA’ 임원들을 ‘재무·이공계·기술통’으로 대거 물갈이했다. 서린동 SK그룹 본사 인근 카페에는 같은 건물을 쓰는 회계사(CPA) 학원의 수험생들로 가득하다.
'IB 디톡스' 나선 SK그룹
SK그룹이 자본시장과 담을 쌓은 것은 ‘유동성 파티’의 후유증 때문이다. 코로나19 직후 초저금리 속 호황기에 가장 큰손은 단연 SK그룹이었다. 계열사마다 기존 사업을 팔고 신규 사업을 인수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 같은 매물을 여러 계열사가 인수하려 경쟁 하기도 했다. 기존 제조업에서 탈피해 당시 열풍이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기업으로 얼마나 빠르게 탈바꿈하는지가 최고경영자(CEO)의 평가 기준이었다.
SK에코플랜트가 대표적이다. 건설을 버리고 환경 플랫폼으로 재탄생하겠다는 포부를 내걸고 2020년부터 M&A에만 4조원을 쏟아부었다. SK테스(1조원), 리뉴어스(1조원) 등 조 단위 거래도 이어졌다. 내부 자금뿐 아니라 PEF 자금도 대거 끌어왔다. 수년 뒤 회사를 ‘20조원’에 상장하면 모두가 해피엔딩일 것이라고 믿었다.
장밋빛 환상은 금세 무너져내렸다. 스마트폰 같은 정보기술(IT) 기기 재활용에 특화한 SK테스를 인수해 전기차 배터리 재활용까지 접목하려던 계획은 벽에 부딪혔다. 배터리 폐기를 둔 기술장벽이 예상보다 높은 데다 전기차 캐즘까지 겹치며 확장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1조원이나 들여 인수한 환경 플랫폼 리뉴어스의 기업가치도 수직 낙하 중이다.
제 역할 못한 컨트롤타워
그룹 지주사 SK와 중간지주사 SK스퀘어 등 컨트롤타워는 그룹의 중심을 잡아주기는커녕 유동성 파티를 부추겼다. SK는 애널리스트와 투자자 앞에서 더 이상 기업이 아니라 PEF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SK스퀘어도 IB·PEF 인사들의 ‘묻지마 영입’에 여념 없었다. 글로벌 PEF에서 허위 보고로 경질된 인사도 임원으로 영입됐다. 이들을 앞세워 SK하이닉스에서 받은 배당으로 당시 뜨거웠던 암호화폐, 메타버스, 게임사 등에 대거 투자했다. 대부분 원금의 절반조차 건지기 어려워졌다.
금리 인상기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SK그룹을 회생시킨 것은 화려한 경력의 IB 인력 뒤에서 소외받아온 ‘기술통’이었다. 경기 이천 공장에서 묵묵히 땀 흘려온 SK하이닉스의 고대역폭메모리(HBM) 기술 인력들이 빛을 보면서 그룹 리스크가 전방위로 확산하는 것을 막았다. SK에코플랜트가 인수한 회사들의 적자를 그나마 방어한 것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에 세운 초대형 화공 플랜트, 세계 최장 현수교인 ‘튀르키예 차나칼레대교’ 곳곳에 새겨진 옛 SK건설의 기술력 덕이었다.
한숨 돌린 SK그룹에 필요한 것은 철저한 반성의 기록이다. 임진왜란 후 남긴 징비록처럼 어떤 잘못이 그룹의 위기를 초래했는지 경계하고 살펴야 한다. 수많은 자본시장의 ‘달콤한 유혹’ 속에서 그룹의 중장기 성장동력을 장착하려면 지금의 후유증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