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북한 인민에겐 온실에서 생산된 토마토, 오이보다는 식량이 더 시급하다. 쌀 1kg은 1년 전에 비해 60% 오른 북한 돈 8000원에 거래되고, 석탄을 비롯한 땔감 가격도 최근 두 달 동안에만 50% 이상 뛰었다. 달러 환율은 1년 전보다 무려 2.5배나 올랐다. 인민은 식량과 땔감 가격을 감당하지 못해 주린 배를 안고 추위에 떨고 있는데 김정은에겐 대규모 온실 건설이 우선이었다.
북한은 생산비를 시장에서 환수하는 시장경제 체제가 아니어서 초대형 온실 운영에 드는 연료, 전력, 비료 등을 장기적으로 감당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최근 5년 내 건설한 다른 3개의 초대형 온실은 가동되고 있다. 인민의 땔감은 없어도 온실 난방용 석탄은 보장된다는 의미다.김정은의 ‘삽질’ 구상은 온실에만 머물지 않는다. 특히 올해 통이 커졌다.
지난해엔 매년 지방공업공장 20개를 짓겠다고 하더니 여기에 더해 올해는 군 병원 및 종합봉사소 3개를 시범적으로 건설하고 내년부터는 20개씩 짓겠다고 공언했다. 비싼 의료 장비를 수입해야 하는 병원 건설은 지방공장 건설보다 돈이 더 많이 든다. 김정은은 또 평양 1만 가구 주택 공사를 앞으로도 이어가고, 원산갈마관광지구를 6월까지 개장하겠다고 밝혔다.
확실히 김정은의 자신감과 씀씀이가 달라졌다. 그의 돈주머니는 어디에서 채워졌을까. 전통적으로 북한은 북-중 교역을 통해 외화를 벌었다. 사상 최강의 유엔 대북제재가 시작되기 직전인 2016년에 북한의 대중 무역 의존도는 88.2%였고, 무역 규모는 58억 달러였다. 하지만 지난해 북-중 무역 규모는 21억8000만 달러로 8년 전의 37.6%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특히 2016년에 26억 달러였던 대중 수출액이 지난해엔 3억2000만 달러로 급감했다. 요즘 최악으로 악화된 북-중 관계까지 감안하면 김정은이 중국에서 외화를 조달하긴 어렵다.여기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기간인 2020년 1월부터 2023년 7월까지 3년 7개월 동안 북한 국경은 꽁꽁 닫혔고 대외 교역도 중단됐다. 김정은 돈주머니가 텅텅 비어야 정상이지만 최근 건설 행보는 그와는 반대다. 최근 1년 남짓 김정은이 어디선가 많은 돈을 얻게 됐다는 의미다.
추정 가능한 자금 출처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우선 러시아에 탄약과 무기, 심지어 파병까지 한 대가를 받고 있다는 의미다. 얼마나 받았는지는 양국이 침묵하는 한 외부에서 알 수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면 이후 뒤따를 대규모 건설 수요에 북한 노동자들이 대거 파견될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원산갈마관광지구를 러시아 전상자(戰傷者)들을 위한 휴양시설로 전용한다면 김정은의 돈주머니는 더욱 불룩해질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북한 해커들의 활약이다. 21일 가상자산 거래소 바이비트에선 사상 최대 해킹 피해가 발생했다. 북한 해킹조직 ‘라자루스’로 추정되는 해커들이 무려 15억 달러 상당의 암호화폐를 빼갔다. 또 미국 암호화폐 분석회사 체이널리시스에 따르면 지난해 북한 해커들이 탈취한 암호화폐 액수는 13억4000만 달러로 전 세계 가상자산 해킹 피해액의 61%에 이른다.
김정은은 이렇게 훔친 돈만으로도 충분히 대규모 토목공사를 감당할 수 있다. 현재 북한 해커 대다수는 중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을 막지 못한다면 ‘도둑놈의 자신감’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그런데 김정은이 대규모 토목공사에만 돈주머니를 여는 이유는 뭘까. 건설 자재를 외국에서 사올 돈으로 러시아에서 밀만 수입해도 장마당 물가 상승으로 인한 인민의 아우성은 막을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역사 속에 사라진 수많은 독재자가 이미 해 주었다. 독재자에겐 국민을 채찍질할 구실이 필요하다. 채찍을 휘두르기엔 대규모 토목공사만 한 것이 없다. 인민이 마감이 정해진 삽질 과제에 정신을 쏟다 보면 불평할 여유도 없게 된다. 김정은은 그저 채찍만 열심히 휘두르면 된다. 생활고로 인한 인민의 비명이 높아질수록 김정은이 휘두르는 채찍 소리는 더욱 높아지게 될 것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좋아요 0개
- 슬퍼요 0개
- 화나요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