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여성국극 끊어질듯 이어지고 사라질듯 영원하다' 유수연 감독
"日 여성가극단, 평일 오전에도 2천석 가득…국극 예술로 인정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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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서이레·나몬 작가의 웹툰 '정년이' 주인공인 소리 천재 윤정년은 여성국극 배우가 돼 부자로 살겠다며 집을 나가 서울로 향한다.
국극이 전국민적 인기를 누렸던 1950년대 톱스타 배우들은 정년이의 말대로 "돈을 가마니로 벌어" 대궐 같은 집과 자가용을 사고 집안도 일으켰다.
그러나 이후 영화와 텔레비전에 자리를 빼앗기고 국가 지원마저 남성 중심의 예술 장르에 집중되면서 국극은 빠르게 쇠퇴했다. 지금은 1세대 배우 조영숙(91) 명인의 제자 황지영(32)과 박수빈(40) 등 극소수 배우들이 힘겹게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의 무대는 주로 지역 축제나 양로원, 노인정, 교도소에 차려진다. '정년이'가 드라마로 만들어진 후 국극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현실은 팍팍하다. 소극장에서라도 정식 공연을 올리려면 제작진을 찾아가 도와달라 읍소하고 빚도 내야 한다.
국극의 전성기를 맛조차 보지 못한 젊은 배우들은 대체 왜 계속 국극을 하려고 하는 걸까. 유수연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여성국극 끊어질듯 이어지고 사라질듯 영원하다'에서 이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을 듯하다.
"1년 넘게 지영 씨와 수빈 씨를 보며 제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이 '왜 이렇게까지 하냐'였어요. 스승과 선배에 대한 존경 그리고 무대에서 진짜 내 모습을 보여주고 관객에게서 받는 갈채를 못 잊는 것 같아요. 죽을 때까진 (국극을) 못 끊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최근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만난 유 감독은 자신 역시 두 배우를 이해하기 어려웠을 때가 있었다고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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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유 감독도 이 작품을 만들고 개봉하기 위해 사비를 털기는 마찬가지였다. 촬영을 시작하던 2023년 초는 국극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던 때라 제작 지원을 신청하는 족족 떨어졌다고 유 감독은 회상했다.
그는 판소리를 소재로 한 데뷔작 '수궁'을 계기로 여성국극에 관해 알게 되자마자 매료됐다. 국극을 제대로 다룬 다큐멘터리를 반드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뒤 조 명인과 제자들을 설득해 이들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유 감독은 "국극의 유행은 계급의 가장 밑바닥에 있던 이들이 가장 위에 있던 사람들을 불러내 공연을 보게 한 문화 혁명적인 사건"이라고 강조했다.
"1950년대 여자 소리꾼은 기생 출신에 아편쟁이라는 편견이 팽배했던 때였어요. 6·25 전쟁까지 터져 혼란했던 정세 속에서도 국극은 꽃을 피웠고, 사람들에게 헤테로토피아(현실에 존재하는 유토피아)를 선사했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대만, 일본 등에서도 비슷한 여성 공연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어요."
하지만 이들 나라가 여성 공연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은 반면 우리나라에선 국극의 가치를 등한시하고 있다고 유 감독은 지적했다. 특히 황지영, 박수빈과 함께 일본의 여성 극단 '다카라즈카' 공연을 보러 갔던 때를 떠올리며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수빈 씨가 다카라즈카 공연을 보고 나서 많이 힘들어했어요. '이런 데서 공연을 한 번만 해보고 싶다'고 했죠. 소위 '현타'(회의감)를 느낀 것 같아요. 우리 국극은 어쩔 땐 관객 두세 명을 앞에 두고 공연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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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오전 시간에도 2천석 규모의 대극장이 꽉 찰 정도로 일본의 여성가극단은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일부 인기 배우들은 영화배우 못지않은 스타급 대우를 받는다.
유 감독은 "일본은 전통을 올드하다며 배척하지 않고 현대적인 것과 공존하려 한다"면서 "반면 한국은 우리 소리를 탄압한 일제에 이어 광복 후 정부도 현대 음악을 가르치고 국악은 뒷전으로 생각했다"고 짚었다.
"'정년이' 덕에 국극을 향한 관심이 커진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지금의 관심도 반짝하고 끝일 거예요. 수빈 씨, 지영 씨가 '정년이' 이후 인터뷰를 50번 넘게 했는데 공연하자고 연락하는 곳은 여전히 없습니다."
유 감독은 국극을 보존하기 위해선 국가유산 지정과 공연 지원, 후진 양성이 필수적이라고 힘줘 말했다. 황지영과 박수빈을 필두로 한 여성국극제작소가 안산문화예술의전당 상주예술단체로 선정되고 단원 오디션을 치르긴 했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국극이 제도권으로 처음 진입한 건 물론 획기적인 사건이라 생각해요. 국극 배우들은 '인정'에 대한 갈증이 가장 크니까요. 국극이 국가유산으로 지정되기를 바라는 건 우리 문화를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지만, 하나의 예술 장르로 당당히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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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mbo@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5년03월12일 07시00분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