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발장에게 어떤 판결 내릴까… 판례 분석 앞선 ‘AI 판사’가 못 넘는 벽 [강용수의 철학이 필요할 때]

3 hours ago 1

AI 판사 도입은 필요한가?
법학 교수보다 높은 평가 받은 AI
판례 정리서 법률 자문까지 위협
누스바움 “판사의 조건, 공감능력”
편향 거른 공적감정은 공정 뒷받침
‘장발장’은 따뜻한 합리성 일깨워
공감-상상력 필요할 때 AI는 한계

《 인공지능(AI) 판사를 시급히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판결의 공정성에 의문이 제기될 때마다 터져 나온다. AI 기술의 발전 속도를 고려하면 머지않아 AI의 판결을 인간의 판결보다 더 신뢰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문과 인재들이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으로 몰려가 변호사시험을 통과하고도 흡족한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진 데는 AI의 영향이 적지 않다.

로펌들이 신입 변호사를 채용하는 대신에 판례 정리 등 기초적인 업무를 AI에 맡기고 있기 때문이다. 》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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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의 질문에 로스쿨 교수보다 AI가 더 우수하게 답변했다는 최신 연구도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 로스쿨 교수이자 ‘법무혁신 프런티어 테크놀로지 랩(LIFT Lab)’을 이끄는 줄리언 냐르코 교수는 미 14개 로스쿨 교수 16명과 함께 AI가 학생들의 법률적 질문에 얼마나 정교하게 답할 수 있는지를 검증하는 연구를 했다. 우선 AI와 교수에게 같은 질문을 제시한 뒤 답하게 했다. 이후 어떤 답변이 인간 교수의 것이고 어떤 답변이 AI의 것인지 알 수 없도록 하는 ‘블라인드 테스트’ 방식으로 참여 교수들이 답변을 교차 평가하게 했다. 5월 발표된 연구 결과는 AI의 완승이었다. 참여 교수들은 동료인 인간 교수의 답변보다 AI의 답변에 현저히 높은 점수를 줬다. 맥락에 맞는 법률을 찾아내 추론을 통해 결론을 도출하는 법학 영역에서도 AI가 인간 교수를 능가하는 역량을 보였다는 얘기다. 또 교육적으로 유해하거나 잘못된 정보를 담은 답변 역시 AI(3.5%)가 교수(12%)보다 훨씬 적게 내놓았다.

전체 순위에서도 인간 교수진은 평가 대상에 포함된 모든 AI에 밀려 최하위에 머물렀다. 클로드 오퍼스 4.7, 챗GPT 5.4, 제미나이 2.5 프로, 노트북LM 등 활용한 AI 모델 모두가 로스쿨 교수들의 평균 점수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다. 첫 평가가 2025년 8월 이뤄진 점을 감안하면 AI의 빠른 진화로 인간 교수와의 실력 격차는 더 벌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교육 현장에서는 AI 튜터가 유용할 수 있다는 기대와 함께 로스쿨 교수의 자리마저 안전하지 못하다는 우려가 나온다.

하지만 이럴수록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을 찾아야 한다. 과연 인간만이 지닌 능력은 무엇일까.

세계적인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판사의 덕목으로 문학적 상상력을 꼽는다. 그는 저서 ‘시적 정의’에서 정의로운 판단을 위해서는 타인의 삶과 고통에 대한 공감이 필요하며, 문학은 이러한 공감능력을 길러주는 중요한 도구라고 주장한다. 감정은 비합리적이라는 이유로 법정에서 배제된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공감은 공정성이라는 논리로 정당화되는 타자에 대한 무관심을 극복하고 사사로운 감정을 걸러냄으로써 ‘공적 감정’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 또한 그 공감이 공적 영역, 특히 법정에서 판사와 배심원의 합리적 판단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누스바움이 강조하는 ‘판사의 3인칭 관점’은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 나오는 ‘분별 있는 관찰자(Judicious Spectator)’ 개념을 차용해 발전시킨 것이다. 분별 있는 관찰자란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이자 사건 당사자들에게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제3자를 뜻한다. 3인칭 관점 역시 역지사지에 따라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일처럼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러나 모든 공감이 무분별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공적 감정이 되려면 사적 감정의 정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 타인의 처지에 공감하더라도 당사자의 입장에서 생겨나는 친소관계의 편향이나 그에 따른 왜곡된 선호는 지양해야 한다.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가 비판했듯이 공감과 연민은 먼 사람보다 가까운 사람에게 더 크게 느껴지는 경향이 있다. 가령 같은 재난이라도 외국인보다 한국인의 고통에 더 마음 아파 하듯 팔이 안으로 굽는 편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3인칭 가상의 관찰자 입장을 취함으로써 감정적 편향성을 갖지 않고 정제된 감정을 통해 객관성을 확보해야 한다. 이렇게 공감이 정화 과정을 거쳐 공적 감정으로 승화된다면 판사는 재판의 중립성과 공정성, 형평성을 크게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공감능력을 활용할 수 있다.

분별 있는 관찰자라면 역지사지의 상상력과 이성적 판단을 바탕으로 타인의 불운에 함께 참여하는 ‘공적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 타인에 대한 공감을 통해 정의감이 형성된다면, 그 공감은 공적 영역을 변화시키는 힘이자 공적 추론의 중요한 토대가 된다.

인공지능(AI) 판사가 인간 판사를 대체할 수 있을까? 소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오른쪽 사진은 영화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은 배고픔 끝에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간 옥살이를 했다. 법철학자들은 기계적인 법 적용뿐만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공감능력 또한 정의로운 판단의 중요한 조건이라고 강조한다. 게티이미지뱅크·사진 출처 UPI코리아

인공지능(AI) 판사가 인간 판사를 대체할 수 있을까? 소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오른쪽 사진은 영화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은 배고픔 끝에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간 옥살이를 했다. 법철학자들은 기계적인 법 적용뿐만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공감능력 또한 정의로운 판단의 중요한 조건이라고 강조한다. 게티이미지뱅크·사진 출처 UPI코리아
법정에서 판사가 정의감과 공정성을 뒷받침할 공감능력을 갖춘다면 이성과 감정을 조화롭게 발휘해 사회적 약자를 위한 공정하면서도 자비로운 판결을 내릴 수 있다. 가령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처럼 생계를 위해 빵을 훔친 사람을 판단할 때, 법 조문만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냉정한 공정성보다 인간적 사정을 헤아리는 따뜻한 합리성을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그렇다면 진정한 공감능력이 결여된 AI가 인간을 대신해 판사의 역할을 맡는 시대는 아직 멀지 않았을까.

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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