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구한 ‘사인의 역사’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사인이 있다. 서양뿐 아니라 낙관, 인장과 같은 도장 문화가 널리 퍼진 동양에서도 수결(手決)이라고 통칭하는 다양한 방법의 사인이 있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손으로 갈겨쓴 글씨가 한 인격체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쓰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바로 사피엔스의 진화와도 관련돼 있다.
사람의 손끝은 뇌와 아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인간은 육체적인 불리함을 무릅쓰고 손의 자유를 얻었고, 모든 진화의 과정은 뇌와 손이 연동돼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핀셋으로 좁쌀을 집거나 실을 바늘귀에 넣는 정교한 작업을 할 때 온몸의 근육은 극도로 경직되고 혀로 입술을 축이는 등의 행동을 함께 한다. 손이야말로 인간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고도로 발달한 기관이다. 사람들은 흔히 펜을 쥐면 무의식적으로 무언가를 그린다. 심지어 글씨를 모르는 갓난아기들도 마찬가지여서, 연필이나 크레파스를 쥐여주면 누가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사방에 무엇인가를 그린다.
5만 년 전 구석기인의 손도장
선사시대 이래로 손의 미세한 움직임은 사람의 생각을 표현하는 1차적인 도구가 됐다. 그리고 인간의 자아가 발달하면서 각 인간의 개성은 고스란히 손끝을 통해 표현됐다. 구석기 시대 이래로 인간이 만든 도구와 예술품은 똑같은 것이 없다. 사소해 보이는 사인이 각 사람의 개성을 대표하는 도구가 된 과정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기나긴 인류의 진화와 역사를 대변하는 필연적인 결과인 셈이다.
약 5만 년 전부터 추위를 피해 동굴에서 살던 사피엔스들은 곳곳에 자신들의 벽화를 남겼다. 기후가 급격하게 변화하고 빙하기를 거치면서 그전까지 우세했던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했다. 대신 사피엔스들이 득세했는데, 이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동굴 속에서 보내게 됐다. 네안데르탈인과 비교해 상상력과 예술 감각이 뛰어났던 사피엔스는 수많은 시간을 동굴 안에서 보내면서 다양한 벽화를 그리고 의식을 만들어냈다. 스페인 알타미라, 프랑스 라스코 동굴 등 수많은 동굴의 벽화는 지금의 시각으로 보아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동굴벽화는 혹독한 환경을 딛고 꽃피운 최초의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명품이다. 인류 최초의 사인은 바로 최초의 예술품과 함께 발견됐다. 다양한 동굴벽화에는 오늘날의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손바닥 ‘낙관’이 보인다. 최근에는 약 5만 년 전 인도네시아의 칼리만탄 동굴에서도 손바닥 그림이 발견됐다. 이런 낙관의 풍습은 신대륙까지도 이어져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아르헨티나의 리오핀투라스 암각화에도 잘 남아있다. 시베리아의 사람들이 베링해를 넘어 아메리카로 건너간 것은 약 1만6000년 전이었다. 그 최초의 아메리카인들은 1만4000년 전 남미 대륙에도 도달했다. 이들이 이동하면서 유라시아 빙하기의 예술도 함께 건너갔고, 그 결과 아름다운 벽화와 사인이 남겨진 것이다. 이 손바닥 표현은 때로는 수십 개가 모여있기도 했는데, 마치 단체 사진처럼 함께 모여 각자의 개성을 표현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구석기 시대 손바닥 벽화를 보면 요즘 사람들이 소셜미디어에서 ‘좋아요’를 누르는 행위가 연상된다. 구석기 시대 바깥은 극도로 추웠기 때문에 사냥과 같은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사람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어두운 동굴 속에서 보내야 했다. 밖에 누가 살고 있는지, 어떤 괴물이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불안한 상황에서 자신의 존재를 누군가에게, 나아가 후손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들의 활약을,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은 욕구를 손바닥 낙관으로 표현한 것은 아니었을까.
무한책임 알리는 장인의 사인
사인의 또 다른 용도는 마치 이름표를 쓰듯 자신이 만든 물건임을 표시하거나 자신의 소유임을 밝히는 것이다. 1971년 발굴된 백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왕비의 은팔찌 안쪽에는 ‘다리(多利)’라는 장인이 만들었다고 쓰여 있다. 일본 호류(法隆)사의 불상을 만든 작가의 이름은 ‘도리(止利)’인데, 무언가 서로 비슷해 보인다. 쇠돌이, 돌이 같은 조선 시대 이래 흔한 이름과도 비슷하지만 관계는 확실하지 않다. 여하튼, 그 귀한 은팔찌의 안에 철필로 그어서 이름을 새겼으니 이는 그만큼 장인의 작품이라는 자존심을 드러낸 것이다.
중국에서도 한나라의 여러 명품에 장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2000년 전 흉노의 여러 무덤에서는 한나라 조정에서 바친 명품들이 함께 묻혀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흉노인들이 좋아하던 물건은 칠기였으니, 색깔도 아름답고 가벼워서 유목민들에게 적합했다. 그런데 그 칠기의 뒷면에는 빽빽하게 중국 장인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바로 나무로 틀을 짜고 그 위에 옻칠을 하는 장인까지 5단계의 공정을 담당하는 사람들이다. 만에 하나 불량품이라도 나오면 무한책임을 진다는 뜻이다.
사인은 장인정신의 상징인 동시에 권력자의 소유를 표현하는 상징이기도 했다. 한나라의 장인이 목숨을 걸고(?) 만든 칠기를 받은 흉노의 왕 선우는 그 뒷면에 자신만의 사인을 멋지게 그려 넣었다. 흉노를 대표하는 왕족의 고분, ‘노용울’과 같은 최고권력자의 무덤에서 발견된 칠기의 뒷면에는 독특한 기호들이 있다. 마치 아들 자(子)를 연상시키는 사인인데 머리 부분은 태양을 연상하듯 동그랗게 돼 있다. 선우는 자신들을 ‘텡그리 호트’ 즉, 하늘의 아들인 선우라고 불렀으니, 하늘의 아들을 상징하는 사인인 셈이다. 얼핏 보면 휘갈긴 듯한 담벼락의 낙서 같지만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 권력자의 힘이 숨어있는 사인이다.
조선에서도 발달한 사인
손으로 쓰는 서명을 사인이라고 하는 것처럼 지금의 사인은 근대화 이후에 널리 사용됐다. 흔히 한국을 포함해 전통적으로 직인이나 옥새 같은 도장이 더욱 선호됐다고 생각하지만 사인 역시 도장만큼이나 역사가 길다.
도장은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처럼 아름답고 위엄이 있다. 또한 찍혀 나오는 글씨를 통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정교하게 만들면 위조가 가능하고 누군가에게 도난당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도장과 함께 수결이라는 사인을 함께 사용했다. 지금의 사인처럼 자신의 이름을 기반으로 개성 있고 예술적인 수결을 사용하였으니, 그 사람의 학식과 권위를 상징했다. 지금도 남아있는 조선시대 왕들의 수결은 유려하고 힘차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한쪽에는 수결을 연습한 흔적도 있으니, 멋있는 사인에 대한 열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사인은 글자를 기반으로 한 것인데, 전근대 시대에 대부분의 평민들은 문맹이었다. 특히 글자를 아예 쓰지 않는 유목민들은 ‘탐가’라고 해서 자신이나 부족들의 문양을 바위에 새기고 가축들의 엉덩이나 귀에 낙인을 찍어서 남기기도 했다.
사인에 새겨진 인간 진화의 상징
조선 시대에는 글자를 모르는 평민들을 중심으로 손바닥이나 집게손가락을 대고 그리는 수장(手掌)이나 수촌(手寸)으로 사인을 대신했다. 손바닥을 그리는 방법은 평민뿐 아니라 식자층에서도 분명한 결정이나 결연한 의지를 표현하는 도구로도 사용됐다. 명필로도 이름이 높았던 안중근 의사가 연추마을(현 러시아 크라스키노)에서 단지동맹 결성 직후 수많은 글씨에 그의 손바닥 사인을 남긴 것이 바로 이러한 전통의 연장선이다.
조선 시대의 수인 전통은 아쉽게도 근대 이후 일본에서 고도로 발달된 도장 문화와 서양의 사인 풍습에 밀려서 사라졌다. 하지만 사인은 국적과 관계없이 인류의 진화 및 역사와 함께하는 가장 오랜 풍습이다.
디지털 시대가 되고 수많은 인공지능(AI)이 인간을 흉내 내지만 내 손으로 쓰는 가장 아날로그적인 우리의 사인은 훔쳐 갈 수 없다.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는 사인을 남긴다. 내가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빙하기 시절부터 이어져 온 자신을 표시하려는 우리 사피엔스의 영원한 습관이며, 인간의 자존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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