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 마음을 늘 새롭고 더한층 감탄과 경외심으로 가득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에 있는 도덕법칙이다.’ 뭔 뜻인지는 몰라도 무지하게 있어 보이는 말이죠? 철학자 칸트의 ‘실천이성비판’ 중 유명한 구절로, 칸트의 묘비에도 새겨졌죠. 베를린 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미아 한센뢰베 감독의 프랑스 영화 ‘다가오는 것들’(2016년)은 고교 철학교사 ‘나탈리’(이자벨 위페르)가 주인공. 그녀의 남편도 철학교사인데, 칸트의 이런 언명을 인생 신조로 삼는 남편과 더불어 그녀는 철학적 진리를 실천하는 삶을 살려 노력해 왔어요.
그녀는 치매 비슷한 증세를 보이는 늙은 엄마가 신경 쓰여요. 아버지의 외도로 이혼한 뒤 배우를 하겠다며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엄마를 요양원에 집어넣은 그녀의 마음은 편한 날이 없죠. 또 다른 근심거리가 그녀에게 닥쳐요. 철학 수업 교재로 사용돼온 그녀의 책이 “근엄하고 고지식해 요즘 청소년들에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출판사로부터 절판 통보를 받은 거죠. 하지만 그녀의 시련은 시작일 뿐이에요. 퇴근한 남편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으며 “나 다른 여자 생겼어. 그 사람과 살 거야”라고 선언하고는 집을 나가 버리죠. 세상에나! 칸트의 도덕률? 25년 결혼생활을 하루아침에 저버린 개돼지 같은 남편에게 칸트의 가르침이 대관절 무슨 소용이냔 말이에요.
시간은 치료약처럼 흘러요. 엄마는 죽고, 딸과 아들은 독립해 집을 나가요. 철학 수업에서 나탈리는 철학자 알랭의 ‘행복론’ 중 한 구절을 자기 맹세인 양 학생들에게 읽어줘요. “우린 행복 없이 살 수 있다. 우린 행복을 기대하지만, 만약 행복이 안 온다면 (행복이 올 거란) 희망은 지속되며, 이 상태는 그 자체로 충족된다. 원하는 걸 얻고 나면 덜 기쁜 법. 행복해지기 전까지만 행복할 뿐이다.” 급기야 나탈리는 참된 자유와 행복을 획득해요. 남편과 배움과 신념에 배신당한 채 행복을 열망하는 지금이야말로 행복일지 모르니까요.[2] 맞아요. 행복은 불행의 반대말이 아니에요. 행복은 불행의 최소한이에요. 불행하다고 여기는 지금이 알고 보니 행복의 끄트머리였단 사실을 소름 돋게 일깨워 주는 ‘시라트’(올해 1월 개봉)란 스페인 영화가 있어요. 지난해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았는데, 보고 나면 삶에 먹구름이 드리워진 것 같은 더럽게 찜찜한 기분을 일주일간 만끽할 수 있단 점에서 ‘지옥의 묵시록’(1979년)과 쌍벽을 이뤄요.
사막에서 열리는 레이브 파티에 ‘루이스’란 중년 남자가 나타나요. 루이스는 “레이브 파티에 간다”며 집을 나간 뒤 실종된 딸을 5개월째 찾는 중. 어린 아들과 함께 고물 승합차를 집 삼아 사막을 헤매고 있죠.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히피 ‘조시’의 차량 행렬에 합류한 루이스는, 조시를 따라 딸을 찾는 여정을 계속해요.
위기가 엄습해요. 폭우 속에서 좁디좁은 벼랑길을 아슬아슬 지나던 선두 차량의 바퀴가 웅덩이에 빠졌어요. 차량 행렬의 맨 뒤에서 따르던 루이스는 조시를 도우려 차를 세우고 내려요. 잠시 뒤, 아버지의 눈엔 위험천만한 아들의 모습이 포착돼요. 아버지를 따라 차에서 내린 아들이 낭떠러지 코앞에서 반려견과 장난치며 노는 게 아니겠어요? 아버진 기겁해 소리쳐요. “위험해! 얼른 차로 들어가렴.” 천만다행으로 아들은 얼른 차 속으로 들어가죠. 아버지가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아들이 막 올라탄 승합차의 사이드브레이크가 풀리며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집니다. 이슬람에서 천국과 지옥을 잇는 가느다랗고 날카로운 길을 뜻한다는 이 영화의 제목이 이미 일러줘요. 지옥은, 천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반대편에 있는 게 아니라고요. 지옥과 천국은 뺨을 맞댄 샴쌍둥이 같은 사이라고요. 딸을 찾아 헤매는 지옥 같은 지금 이 순간이, 알고 보니 천국이었다니! 지옥 같은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마지막 남은 숨을 몰아쉬며 잡아당긴 문이 더 크고 뜨거운 또 다른 지옥을 여는 문이었다니![3] 10만 명 넘는 반도체 회사 직원들이 매년 성과급 6억 원을 챙겨간단 소릴 들으니, 내 월급 몇백만 원이 대관절 무슨 의미가 있을까 좌절하게 돼요. 내가 그들만큼 열심히 살지 않았던 걸까, 하는 자책도 하게 되고 대책 없는 분통도 터져요. 때마침 인터넷 뉴스엔 2011년 주당 2만 원에 산 SK하이닉스 주식이 이제 200만 원이 넘었다는 어떤 할머니 탤런트의 영웅서사까지 떠돌죠. 고통스럽지만, 고통스러워 말아요. 불안과 초조함에 ‘빚투’(이건 지옥의 단어이고 천국의 단어론 ‘레버리지 투자’라 해요)라도 했다 날려버리는 지옥 같은 내일을 맞는다면, 겨우 박탈감에 부르르 몸을 떨었던 오늘이야말로 배부른 천국이었을 테니까요.
천국은 지옥의 반대말이 아니라, 지옥의 최소한입니다.
이승재 영화평론가·동아이지에듀 상무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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