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프리즘] 민주당은 어떤 대한민국을 꿈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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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프리즘] 민주당은 어떤 대한민국을 꿈꾸는가

문재인 정부가 임기 반환점을 맞은 2019년 11월 즈음의 일이다. 취재하며 가까워진 고위 공무원이 “기사로 쓸 만한지 한번 보라”며 슬쩍 서류뭉치를 건넸다.

제목은 ‘한국의 성장률 둔화’. 영국계 투자은행 HSBC가 글로벌 자산운용사 같은 ‘큰손’ 고객에게만 제공한다는 비공개 보고서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미·중 무역분쟁 등으로 어려운 시기에 한국 정부가 주 52시간 근무제를 밀어붙여 성장률 하락을 부추긴 건 (한국에) 특별히 아픈 대목이다. 한국 정부가 성장 둔화를 자초한 셈이다.’ 함께 건네받은 골드만삭스의 비공개 보고서 내용도 비슷했다. ‘엄격하게 설계된 주 52시간제가 총생산시간을 감소시켜 내년 성장률을 0.3%포인트 깎아내릴 것으로 전망된다.’

자료 유출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문재인 정부의 핵심 정책을 꼬집은 자료를 준 이유가 궁금했다. 그가 들려준 얘기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가진 자원이라곤 ‘열심히 일하는’ 인적자원뿐인데, 그걸 우리 스스로 옭아매는 게 말이나 됩니까. 그냥 두면 대한민국 성장동력이 무너질 게 뻔하니, 답답해서 그럽니다.”

5년여가 흐른 지금, 그 공무원의 걱정은 현실이 됐다. 반도체, 스마트폰, 배터리 등 모든 주력산업이 미국에 치이고 중국에 뜯기는 신세로 전락했다. 인공지능(AI), 로봇 등 미래산업은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경쟁국들과 격차가 벌어졌다. 모든 산업의 경쟁력이 동시다발적으로 약해졌다는 건 대개 둘 중 하나다. 바뀐 세상에 우리 기업만 적응을 못 했거나, 국가 시스템에 문제가 있거나. 안타깝게도 한국 기업의 경쟁력 하락엔 이 두 가지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 같다.

2등에겐 떡고물 하나 떨어지지 않는 ‘승자 독식’이 특징인 AI 시대와 중국의 ‘제조 굴기’가 동시에 들이닥치자 우리 기업들은 코너로 내몰렸다. 전 세계의 돈과 인재를 빨아들여 AI 등 미래산업에 쏟아붓는 미국 빅테크들과 경쟁하기엔 힘에 부친다. 그렇다고 제조업에 매달릴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중국에 밀려 쪼그라들 게 뻔하기 때문이다.

이런 진퇴양난에서 벗어나려면 혁신밖엔 답이 없다. 하지만 혁신이 어디 쉬운 일인가. 혁신은 기업의 부단한 노력과 그걸 받치는 시스템이 따라줄 때 비로소 잉태한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기술만 있으면 돈과 인재가 따라붙는 미국이나 자국 기업이 세계 최강이 될 때까지 국가가 전폭적으로 밀어주는 중국처럼 말이다. 다른 나라엔 없는 온갖 규제와 반(反)기업 정서를 안고 싸워야 하는 우리 기업들이 혁신 경쟁에서 밀린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어떻게 해야 사그라든 혁신의 불꽃을 다시 살릴 수 있을까. 잘못된 시스템부터 정비하는 게 순서다. 주 52시간제 개선이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 한참 고민해온 문제를 풀 실마리가 번뜩 떠올라도 저녁 6시만 되면 실험 장비 전원을 내려야 하는 시스템으론 미국과 중국의 ‘머리 좋은 워커홀릭’을 당해낼 수 없다. 현실이 이러니 기업의 75.8%가 ‘주 52시간제 시행 후 R&D(연구개발) 성과가 줄었다’는 설문 결과(대한상공회의소)가 나올 수밖에. 기업뿐이 아니다. 얼마 전 리얼미터가 일반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선 ‘반도체에 한해 주 52시간 예외를 허용하자’에 대한 찬성(57.8%)이 반대(27.1%)보다 두 배 많았다.

산업 현장에서, 국민 사이에서 주 52시간제를 개선하자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지만, 더불어민주당은 5년 전이나 지금이나 요지부동이다. 민주당에 묻고 싶다. 골리앗과 맞선 상황인데도 우리 기업의 손발 정도는 묶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지. 그래서 형편없이 패해도 괜찮다는 건지. 그러고도 대한민국에 미래가 있다고 보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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