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연의 시적인 순간] 샤프와 삿포로

1 month ago 12

[이소연의 시적인 순간] 샤프와 삿포로

나도 모르게 접시에 하나 남은 딸기를 홀랑 집어 먹고 말았다.

“엄마! 혹시 지금 제 딸기 먹은 거예요?”

“그런가본데.”

“그런가본데라뇨…. 하하하 진짜 엄만 웃겨요.”

웃긴다고 해주니 다행이지만, 남편은 그런 내가 이해가 안 된다고 한다. 나도 내가 이해가 안 된다. 누구는 제 자식 입에 음식 들어가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는데….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심지어 남편이 아들에게 양보한 고기 한 점을 내가 먹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꼭 모성애를 의심받았다. 나조차도 나의 모성애에 의심을 품는 말을 농담 삼아 하곤 했다.

물론 대부분 웃으며 넘겼지만, 모성애를 늘 자기희생으로만 설명하는 말들이 유독 낯설게 느껴지는 날도 있었다. 아들을 위해 용기를 낸 일도 여러 번이고 아픈 아이를 간호하느라 밤을 꼴딱 새운 적도 많은데 딸기 하나로 모성애를 의심받는 건 조금 억울하지 않은가. 나는 아들이 딸기보다 더 원하는 걸 줄 수도 있는데 말이다. 이를테면 한국에서는 아직 구할 수 없는 샤프펜슬 같은 것 말이다.

“엄마가 삿포로에 가면 네가 말한 그 샤프 사 올게.”

“엄마, 또 운동화처럼 잘못 사면 안 돼요. 꼭 사진 찍어서 보내주셔야 해요. 제가 확인할게요.”

어떤 말은 하나의 이미지를 떠올리게도 하고, 나를 어딘가로 데려가 주기도 하나 보다. 설 연휴 동안 시인 친구들과 일본 삿포로에 다녀왔다. 나는 오로지 샤프펜슬을 사기 위해 오타루행을 포기했다. 그리고 오도리역 근방에 있는 대형 문구점(다이마루 후지 센트럴)으로 향했다. 2층 필기구 코너에 도착해서는 연신 아들과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심경 0.5에 로렛 가공과 러버 그립이 혼합된 프로 버전을 원한단다. 몇 마디 안 해도 샤프 마니아답다. 아직 한국에 출시되지 않은 컬러의 샤프는 일본어 번역기를 돌려가며 간신히 찾을 수 있었다.

어쨌건 자신이 말한 세 개 모델 중에 하나만 사 오면 된다고 했는데 두 개를 사 가겠다고 하고는 세 개나 샀다. 삶에서 욕심을 줄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갖고 싶은 것 세 개 중에 하나를 선택할 줄 아는 아들에겐 넘치게 선물해도 될 것 같았다. 게다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는 아들을 보니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비에이 투어에서 설원을 바라볼 때처럼.

그저 평범한 가문비나무 한 그루를 보려고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드나 싶었는데 직접 보니 알 것 같았다. 마치 대성당에 들어선 것처럼 마음이 놓여서 신기했다. 온통 눈으로 덮인 세상에 우뚝 솟은 나무 하나가 십자가처럼 고요했다. 주변이 사람들로 북적이고 소란스러워도 고요했다. 그때 알았다. 단 하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내면은 고요해질 수 있다는 걸. 단 하나. 그 상징은 자꾸만 자기 안에 홀로 남은 이야기를 들으라고 한다. 함께 간 친구들과 나란히 서서 한 그루 나무를 오래오래 바라봤다. 친구들은 내 곁에서 수많은 사람 속에서 고요하게 저 자신의 아주 작은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단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이와 같다면 좋겠다. 단 한 사람을 사랑하면서 고요해지고 그래서 내가 입때껏 듣지 못한 내 진짜 목소리를 듣게 되는 그런 것이라면. 그래서 단 한 사람인 너를 사랑하는 일이 나를 사랑하는 일이 되고 너를 바라보는 일이 나를 바라보는 일이 될 수 있다면. 이 사랑은 내 것을 내어주는 일만으로는 완성되지 않겠지.

샤프를 사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 지붕마다 견뎌내는 눈의 무게를 가늠하며 걸었다. 때마침 우리가 걷는 길목에 높게 쌓인 눈 둔덕이 태양을 삼킨 구름처럼 환하게 부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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