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 맞는 부둣가, 출장객 받는 호텔… 위치가 의미 결정한다[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2 weeks ago 2

〈97〉 자유의 여신상을 보다
보는 구도-세워진 장소 따라… 같은 예술품이라도 의미 달라져
‘아메리칸드림’ 상징 여신상… 美 기울어진 자유 보여주거나
주상복합-현수막 사이 있을 땐… 노골적 한국 사회 욕망 드러내

영화 ‘혹성탈출’(1968년)에서는 인류 문명을 상징하는 자유의 여신상이 부서진 채 해안가에 놓여 있다. 사진 출처 김영민 교수 제공·IMDb 홈페이지

영화 ‘혹성탈출’(1968년)에서는 인류 문명을 상징하는 자유의 여신상이 부서진 채 해안가에 놓여 있다. 사진 출처 김영민 교수 제공·IMDb 홈페이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어린 시절 본 영화 ‘혹성탈출’(1968년)의 결말을 잊을 수 없다. 먼 미래의 어느 날 주인공 일행을 태운 우주선이 이름 모를 행성에 불시착한다. 주인공 일행은 행성을 탐사하다 곧 말을 타고 총을 쏘는 원숭이 무리에게 붙잡히게 된다. 알고 보니 이 행성은 원숭이들이 지배하는 곳이었고, 인간을 닮은 노예들은 우리에 갇혀 있었다. 세상에, 원숭이가 인간을 우리에 가두다니. 이곳은 지구와 정반대의 세계가 아닌가. 천신만고 끝에 원숭이들로부터 도망친 주인공은 해안가에서 부서진 자유의 여신상을 마주하게 된다.》

지구에서 멀리 있는 다른 행성인 줄 알았던 곳이, 다름 아닌 지구였던 것이다. 이 충격적인 결말에서 자유의 여신상은 인류 문명 전체를 상징한다. 원숭이 같은 동물들을 지배하며 자기 위주의 자유를 구가하던 인류는 결국 원숭이에게 구속당하는 부자유한 상태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자만심이 가득했던 인류 문명의 허망한 종말. 망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세계라는 이 역설적 깨달음. 미래와 우주를 배경으로 한 이 고난의 여정은 결국 자기 처지를 깨닫기 위한 여정이었던 셈이다.

영화 ‘브루탈리스트’(2025년) 포스터에 등장한 기울어진 자유의 여신상. 사진 출처 김영민 교수 제공·IMDb 홈페이지

영화 ‘브루탈리스트’(2025년) 포스터에 등장한 기울어진 자유의 여신상. 사진 출처 김영민 교수 제공·IMDb 홈페이지
자유의 여신상은 원래 인류 문명이 아니라 미국 문명을 상징한다. 지금 한창 상영 중인 영화 ‘브루탈리스트’를 보라. 헝가리계 유대인 건축가 ‘라즐로’는 홀로코스트를 피해서 미국으로 망명한다. 천신만고 끝에 대서양을 건넌 망명자나 이민자에게 미국은 실로 자유세계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마침내 뉴욕에 도착한 라즐로를 그 유명한 자유의 여신상이 맞는다. 올려다본 라즐로의 시야에 자유의 여신상은 기이하게 기울어져 보인다. 이것은 영화 전체를 상징하는 장면으로서 영화 포스터로도 사용됐다. 미국에 온 라즐로는 온갖 고생 끝에 결국 아메리칸드림을 이루기는 한다. 초반에 건설 현장에서 고생하던 라즐로는 귀인을 만나 건축가로서 재기한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그 많은 미국 이민자들처럼, 타지에 있는 가족을 불러들인다. 그러나 그가 경험한 미국의 자유는 결코 밝고 아름답기만 한 자유는 아니었다. 자유의 여신상이 기울어져 보였던 것처럼, 미국의 곳곳은 기울어져 있다. 이른바 유색인종은 인종차별을 당하고, 고용자는 피고용자를 강간하며, 삶이라는 전장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은 마약에 탐닉한다. 자유를 찾아온 이 고난의 여정도 결국 부자유를 깨닫기 위한 여정이었던 셈이다.

그 깨달음 속에서 라즐로는 마침내 브루탈리즘(brutalism)이란 건축미학을 구현해 낸다. 콘크리트를 그대로 노출시켜서 어둡고 거칠고 육중하고 날것 그대로의 거친 느낌을 주는 건축. 창문이 없어 침묵의 요새처럼 보이는 건물. 라즐로의 첫 작품은 동유럽의 폐쇄적 상상력뿐 아니라 자유로울 듯 결국 자유롭지 않던 미국에서의 체험을 담고 있다. 창문 없이 폐쇄돼 있기에 그 건물은 자유가 아니라 부자유의 여신상처럼 보인다. 동시에 천장을 통해서 들어오는 외줄기 빛으로 인해 부자유 속에 서 있는 구원의 여신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에서 브루탈리즘이 유대인 망명자의 정신을 표현하듯 현대 한국의 정신을 표현해 주는 건축이 있지 않을까. 한국에도 아름답고 멋진 건물들이 실로 많다. 유명한 외국 작가에게 의뢰해 탄생한 멋진 건물들이 한국인의 정신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드물게 나타나는 천재적인 한국 작가의 작품이 한국인의 무의식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한국인 대부분이 사용해 본 적 있는 예식장이나 모텔 건물이야말로 한국인 다수의 정신을 담고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나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그 이미지들을 수집해 왔다. 실로 한국인의 상상력은 거침없다. 난데없는 고딕 양식의 예식장이 있질 않나, 이슬람 건축을 연상시키는 돔 형태의 모텔이 있질 않나.

국내 한 비즈니스호텔 꼭대기에 자유의 여신상이 설치돼 있다. 사진 출처 김영민 교수 제공·IMDb 홈페이지

국내 한 비즈니스호텔 꼭대기에 자유의 여신상이 설치돼 있다. 사진 출처 김영민 교수 제공·IMDb 홈페이지
나는 작년 겨울에 마주친 어느 비즈니스호텔을 특히 잊을 수 없다. 한국 민중미술 작가 신학철의 회고전을 보러 가던 도중이었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한 조각상의 위용에 넋을 잃고 부랴부랴 차에서 내렸다. 자유의 여신상이 제법 높은 비즈니스호텔 위에서 나를 굽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비즈니스호텔 옆에는 부유층을 위한 고층 주상복합 건물이 솟아 있었고, 앞 건설 현장에는 ‘건설노동자 살길이다, 윤석열을 탄핵하자!’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한국이 아닌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신학철 작가의 작품도, 붉은 현수막도, 그렇다고 불끈 솟은 주상복합 건물도 아닌 바로 자유의 여신상이었다. 해외에 실존하는 미국은 세계를 책임지겠다는 자세를 점점 버리고 있는데, 한국인이 직접 만든 자유의 여신상만큼은 이렇게 비즈니스호텔 옥상에서 한국인을 굽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여신상이 상징하는 자유란 무엇일까. 예술품의 의미는 모름지기 그것이 위치한 장소와 분리되기 어려운 법. 자유의 여신상이 이민자를 맞는 부두가 아니라 도시의 비즈니스호텔에 서 있다면, 그 자유는 봉인 해제된 욕망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난데없이 중국대사관에 난입한 한국형 ‘캡틴 아메리카’처럼.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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