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정을 들어보니 이랬다. ‘긁어 부스럼’이 될까 우려했다는 것이다. ‘의대생과 전공의를 더 자극할 수 있다’ ‘우리가 투쟁에 앞장선 것도 아닌데 나설 자격이 있냐’ 등 편지 발송에 적극적으로 반대한 교수가 많았다고 한다. ‘착취의 중간 관리자’ 같은 비난의 표적이 될까 제자들의 눈치를 보는 분위기가 팽배하다고 한다.
잃은 것 없는 기성세대의 침묵
현재 전국 수련병원에는 전체 전공의의 8.7%만 남아 있다. 전국 39개 의대생의 95%가 휴학 중이다. 청년 의사들의 공분을 이해한다. 그간 수련이라는 이름으로 싼 임금을 감수한 전공의 덕분에 한국 의료 시스템이 유지됐다는 사실에도, 의료 개혁이 선행되지 않은 의대 증원은 이런 착취적 구조를 연장할 것이라는 데도 동의한다. 하지만 길어지는 사직과 휴학의 피해자는 바로 전공의와 의대생이다.재수, 삼수를 무릅쓰고 어렵게 의대에 입학해도 의사가 되려면 짧게 7년, 길게 10년이 걸린다. 수련 기간이 1, 2년 늘어나는 만큼 이들은 인생 시간표를 새로 짜야 한다. 예년의 2.5배인 의대생 7500명이 한꺼번에 졸업하면 벌어질 일도 오롯이 본인의 몫이다. 전공의 없는 병원이 ‘뉴노멀’로 가고 있어 수련 기회가 줄어들고 개원 경쟁도 치열해질 것이다.
반면, 전공의 사직 이후 의사 구인난이 심화됐다. 교수는 더욱 귀해지고 정년이 연장된 경우도 흔해졌다. 동네 의원도 호황이다. 지난해 건강보험급여 지급액을 보면 전공의가 떠난 상급종합병원은 줄었지만 의원은 되레 늘었다. 이제 청년 의사들은 자신의 집단행동이 기존 의료 시스템을 개혁하기보다 왜곡시킨 것은 아닌지, 제자리로 돌아와 ‘착취의 사슬’을 끊을 방법은 없을지 물어야 한다.
‘인생은 스스로의 책임이며, 부모 선배 스승도 대신 살아 줄 수는 없다’. 서울대 의대 교수진이 보낸 편지에 담긴 내용이다. 의정 갈등에서 아무것도 잃지 않은 기성세대가 청년 의사들에게 ‘선택에 따른 책임’을 가르치는 것조차 망설였다니…. 의료계는 정말 어른이 없나.
동료 겁박해도 타이르기는커녕거의 100%가 참여하는, 한 줌 다른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집단행동을 자발적 의지라고 볼 수는 없다. 의료계 전열이 흐트러질 때마다 블랙리스트가 위력을 발휘했다. 최근 서울대 의대 본과 수업에 약 70명이 참석한 사실이 알려지자 의사 커뮤니티에 바로 블랙리스트가 떴다. 원색적인 비난과 함께 “족쳐야 한다”는 식의 위협에 시달렸다.
동료를 겁박하고 괴롭히는데도 이를 잘못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되레 블랙리스트 가해자를 후원하고 과시한 어른이 있었다. 피해자는 그 고통을 “사회적 살인”이라 했는데 말이다.
이번 편지에는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더 나은 사회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는 지혜를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는 구절이 있었다. 폐쇄적인 공동체 안에서 권위가 무너지고 비난을 받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고집불통’ 정부를 상대하며 전공의와 의대생을 설득할 명분을 찾기도 어려웠다. 그래도 교수의 본업은 이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의정 갈등이 사회적 재난이 되어가는 지금, 이처럼 공손한 조언조차도 못 하는 어른이라면 너무 비겁한 것 아닌가.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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