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모든 것은 사라지는가? [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1 month ago 6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내가 열대여섯 살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집개가 사라졌는데, 하루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가 개의 귀환을 기다리는 마음을 접은 것은 보름쯤 지났을 때다. 개는 사라졌고, 다시 돌아오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슬픔이 밀려왔다. 가족의 사랑을 받던 개가 사라지고 빈집과 사료 빈 그릇만 덩그러니 남았다. 우리 식구 모두에게 꼬리를 치고 몸을 비비며 환대를 하던 개의 사라짐이 가족에게 안긴 상심은 컸다. 어린 여동생들은 며칠을 훌쩍거렸다.

그때 사라지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한 달 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어느 아침 녘에 개가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개는 조금 야윈 듯했지만 겉으로는 멀쩡했다. 개는 기뻐서 날뛰며 마당을 구르고 식구들에게 연신 몸을 부벼댔다. 우리는 개가 개장수에게 붙잡혀 갔다가 극적으로 탈출을 한 게 아닐까, 라고 짐작을 했다.

유행과 신념, 이데올로기까지…

[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왜 모든 것은 사라지는가?

한때 살던 집도, 부와 권력도 언젠가는 사라진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은 내가 알던 고향이 아니었다. 나는 눈앞에서 사라진 고향에 큰 충격을 받았다. 고향을 등지고 나오며 사라짐이 존재하는 것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그리고 이 세상의 사물과 존재는 시작과 함께 사라짐이라는 종착역으로 달린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사라진다. 이것은 만물에 적용되는 법칙이다. 새벽마다 종을 울리며 두부를 팔던 두부 장수도, 징을 치며 골목골목을 돌던 굴뚝 청소부도, 야경을 돌고 달이 차면 찾아와 야경비를 받으러 오던 야경꾼도 볼 수 없다. 세상이 변하면서 어떤 직업군은 사라지고 전에 없던 새로운 직업군이 나타난다.

사람이건 물건이건 간에 사라지는 것은 어딘가 슬프고 애틋하다. 그 흔하던 공중전화 부스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길모퉁이의 공중전화 부스에서 동전을 투입하거나 카드를 넣고 제 연인과 통화를 하는 풍경은 낯설지 않았다. 공중전화를 걸려고 긴 줄을 서서 기다리던 시절은 지나갔다. 개인 간 중요한 통신 수단 노릇을 하던 공중전화는 1990년대 후반 휴대전화가 널리 보급되면서 그 쓸모가 줄었다. 그나마 남아 있던 공중전화도 곧 사라질 게 뻔하다. 사라지는 게 공중전화만이 아니다.

사라지는 것들은 여백을 남긴다

유행과 풍속, 금지와 통제, 신념과 이데올로기도 그 효용성이 다하면 사라진다. 사라짐은 우리 생애에서 무시로 겪는 일이다. 삶은 무수한 사라짐 위에 세워진다. 생명을 받고 태어난 나 역시 어느 순간 소멸하며 저 존재 너머로 사라질 테다. 아마 인류가 겪을 가장 큰 사라짐은 우주의 멸실일 거다. 무언가 생길 때가 있으면 사라질 때도 돌아온다. 과학자들은 빅뱅으로 우주가 생겼듯이 그것이 한순간에 사라질 때도 있을 거라고 말한다. 그걸 오메가의 순간이라고 한다. 먼 미래 어느 시점에서 지구는 물론이거니와 우주가 다 사라진다는 것이다.

사라짐은 주체와 대상 간의 탈-거리화이고, 실재의 멸실이자 죽음이다. 생자필멸(生者必滅), 그 불가결성. 우리의 생은 사라짐과 사라짐 사이에 던져진다. 그러다가 사라짐이란 장강의 물결에 휩쓸려 밀려 나간다. 사라지는 것이야말로 사라짐으로 박제되는 것이니, 사라지는 것은 정말 사라지는 게 아니다.

장 보드리야르는 사라짐은 슬픈 게 아니라고 말한다. “사라지는 모든 것은 흔적을 남기기 때문에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자신의 사라짐의 기초 위에서 살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장 보드리야르, <사라짐에 대하여>) 사물이나 생명체들 모두는 제 사라짐의 기초 위에서 존재한다. 어쩌면 사라짐은 존재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사라지지 않는 것은 없다. 실재가 나타나면 실재에 대한 개념이 발호하고, 개념은 실재를 삼켜버린다. 개념이 만들어지는 순간 실재는 사라짐을 향해 내달린다. 한편으로 개념은 사라짐의 반동으로 불가피하게 새 운명을 맞는다. 사라짐은 끝이 아니다. 끝은 시작과 맞물린다. 그리하여 사라진 것들이 만드는 새 지평을 열어젖힌다. 그런 뜻에서였을까? 보드리야르는 왜 모든 것은 아직 사라지지 않는가, 라고 반문한다.

배낭을 메고 지리산 산행에 나선 시인 고정희는 계곡의 급류에 실족해 불귀의 객이 되어 우리 곁을 떠났다. 벗들은 그 주검 앞에 모여서 깊은 슬픔과 상실감으로 오열했다. 그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서른 해가 훌쩍 넘었다. 고정희는 생전에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라는 시를 썼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 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그는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 있는 여백을 보았고, 그 여백이 쓸쓸하다는 걸 알았다. 누군가 사라지면 그의 자리는 텅 빈 부재로 남는다. 시인은 그걸 여백이라고 했다. 여백은 빈자리, 쓸쓸함이 모여 옹송그리는 자리다. 오, 사라진 모든 것들이여, 마음에 자취를 남기며 사라진 것을 그리운 마음으로 돌아보는 일이여!

여백의 메아리에 귀를 기울여라

당신의 곁에 있다가 사라진 것들을 떠올려보라. 사라지는 것은 그냥 사라지는 게 아니다. 사라지는 것은 반드시 여백을 남긴다. 그것은 실재의 그림자와 그 흔적이 만드는 의미의 메아리들로 채워진다. 한밤중에 사라진 것들을 떠올리며 그 이름을 호명한다. 아버지의 흑백사진, 가족 앨범, 옛 화폐, 어린 누이의 노래, 옛 동무들의 웃음소리, 해 질 무렵 나를 부르던 어머니의 목소리 들은 사라진 것에 속한다. 그것들 하나하나에 내 생령(生靈)의 조각이 깃들어 있다.

나는 그것과 함께 존재했으니, 사라진 것들이야말로 내 존재의 기반이었다. 그것들이 없었다면 나는 한낱 걸어 다니는 몽상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을 테다. 인간은 대체로 먼저 온 순서대로 이 지구를 떠나 사라진다. 지금 살아있는 것 역시 어느 순간 존재 너머로 사라진다. 저 먼 곳에서 사라진 것들이 나에게 소리친다. 이 순간 나는 적적한 밤에 혼자 깬 채로 저 먼 곳에서 오는 메아리에 귀를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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