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정은]‘협상 카드가 없는 나라’의 굴욕

1 week ago 4

이정은 부국장

이정은 부국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몰아치고 다그친 정상회담의 마지막 10분은 지켜보기가 민망했다.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회담에서 강대국 지도자가 상대국을 그토록 노골적으로 면박 준 장면은 찾기 어렵다. 부통령과 언론인이 가세한 협공은 ‘매복’ ‘함정’ 등의 평가가 나올 정도로 일방적이었다. 역사에 남을 굴욕의 현장이다.

우크라이나 뒤에는 그간 지지를 표명해준 28개 유럽 국가가 있었다. 자국을 무력 침공한 러시아에 맞서 영토와 주권을 지키겠다는 명분도 확실했다. 중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희토류를 확보하려는 미국에 내밀 광물 자원도 상당했다. 그 어느 것도 트럼프 대통령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안전보장의 교환 조건으로 쓰려던 광물은 과거 받았던 지원에 대해 당연히 치러야 할 대가가 돼 버렸다. 우크라이나가 침략 피해자가 아니라 “러시아를 자극해 전쟁을 촉발한 나라”로 위치가 뒤바뀌어 버린 것도 순식간이다.

트럼프 공세에 맞대응 실패한 우크라

궁지에 몰린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트럼프 대통령은 “당신에게는 (협상) 카드가 없다”는 말을 반복했다. 벌써 3년째 전쟁을 치르며 국력을 소진한 우크라이나가 반박할 근거는 없어 보였다. 땅덩이는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크지만 사회 분열과 부패에 시달려온 나라, 국내총생산(GDP) 순위가 57위에 그치는 나라, 러시아로부터의 안보 위협이 상존했음에도 이에 대응할 외교력이 부족했던 나라가 처한 엄연한 현실이다.

국제정치는 냉혹하다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몰고 온 냉기는 초저온이다. 한국도 어느 시점에선 신(新)외교 빙하기의 한가운데서 그를 상대해야 할 순간이 올 것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앉았던 백악관의 의자에 한국 대통령이 앉게 됐을 때 공개적으로 “한국이 미국을 호구 삼았다”는 협공을 받게 되지 말란 법 없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의 핵 협상에서 패싱 우려를 제기하는 한국에 “북한이 안보 불안 때문에 핵 개발에 나서도록 촉발하지 않았냐”는 식의 공격이 가해진다면? 미국이 안보 지원의 대가로 한국의 핵심 이익을 양보하도록 압박하는 장면이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게 마냥 뜬금없는 상상은 아니다.

젤렌스키 자리에 韓 정상이 앉는다면

70년 넘게 동맹을 유지해온 미국과의 경제, 안보 협력이 쉽게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알던 미국은 이제 없다’는 전제에서 새로운 전략을 찾아야 할 때다. 유럽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악을 대비하자”며 방위비를 대폭 증액하고 유럽 중심의 안보 연합 구성 추진에 나섰다. 기존의 나토(NATO)에서 미국을 뺀 유럽만의 ‘이토(ETO·European Treaty Organization)’를 만들자는 제안도 나오는 판이다. 주요국들이 앞다퉈 추구하는 ‘자력갱생’의 핵심은 국부(國富)다. 조 단위로 이뤄지는 국방비 증액도, 미국발 관세 폭탄 대응도 모두 국가의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가능하다. 이런 바탕이 탄탄해야 ‘거래적(transactional)’이라는 키워드로 설명되는 트럼프 행정부에 우리만의 협상 카드를 내밀 수 있을 것이다. 방산과 반도체 등 핵심 산업 분야의 초격차 첨단기술을 보유하는 것도 주요한 협상 카드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최대 관심사는 중국 견제, 그 과정에서 강화해온 미국 중심의 공급망 구축과 기술 협력이다.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것을 갖고 있다면 그게 손에 쥔 카드다.

그 카드가 점점 얇아지고 작아지고 있는데도 정상 외교는 공백 상태에 여야는 극단의 정쟁만 이어가고 있다. 반도체특별법은 공전이고 거야(巨野)는 상법 개정안으로 경제를 흔들어대는 중이다. 우리에게 그럴 여유가 아직도 남아있다고 착각하는 정치권의 행태에 속만 터진다.

오늘과 내일 >

구독

이런 구독물도 추천합니다!

  • 횡설수설

  • 강용수의 철학이 필요할 때

    강용수의 철학이 필요할 때

  • 여주엽의 운동처방

    여주엽의 운동처방

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