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장황한 거짓말은 구차한 변명일 뿐일까. 법 기술자의 요령 있는 궤변일까. 그렇게만 치부하기에는 개운치 않다. 그의 최후 진술이 우리 사회가 존중해 온 민주주의적 가치를 교란하는 언어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계엄령은 계몽령” 언어 통한 현실 조작
윤 대통령은 끝까지 12·3 비상계엄이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 “국가와 국민을 위한 계엄”이라고 주장했다. 지난해 12월 대국민 담화를 통해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태연한 거짓말을 반복해서 듣다 보면 사실과 거짓의 경계가 흐릿해질 수 있다. 그가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군경을 동원해 계엄을 했다’는 본질은 희석됐고, 역사적 트라우마를 자극했던 계엄령은 ‘계몽령’으로 오염됐다.계엄령이 계몽령으로 둔갑하기 위해선 망국적 위기 상황을 불러온 적이 필요했다. 그는 “내란 공작 세력들이 국민을 선동하고 있다” “북한을 비롯한 외부의 주권 침탈 세력들과 반국가세력이 연계해 국가안보를 위협한다”고 했다. 계엄의 정당성을 강변하는 동시에 계엄의 원죄를 반국가세력에 물으라는 주장이다. ‘이적 탄핵’ ‘선동 탄핵’ 같은 구호를 섞어 국민적 분노의 대상을 바꾸려고 시도한다. 차마 계엄을 계몽이라 부를 수 없는, 계엄을 용서할 수 없는 국민은 졸지에 국헌 문란에 동조한 반국가세력이 됐다.
적이 나타나긴 했지만, 도대체 무슨 일을 벌였는지 알 수 없었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방치할 수 없다는 절박함”에서 비롯된 계엄이라는데 계엄 선포 당일 국민은 여느 날과 다름없는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윤 대통령은 “당장은 괜찮아 보여도 얼마 뒤면 큰 위기로 닥칠 일들이 대통령의 시야에는 들어온다”고 주장한다. 계엄이라는 현실과 망국 위기라는 허구는 ‘북한 지령설’ ‘부정선거론’ 같은 음모론으로 연결됐다. 부정선거에 동조하는 여론이 40%가 넘었다는 조사도 있다. 극히 일부의 망상으로 여겨지던 부정선거론이 선거 제도의 신뢰성을 흔들 정도로 세력을 키웠다.
그의 선전전이 역사적으로 새로운 일은 아니다. 일관된 거짓말로 왜곡된 현실을 창조해 대중을 속이는 것, 정치철학자 해나 아렌트는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이를 전체주의 선전의 특징이라고 했다. 그래도 권력자의 구호를 합리적으로 의심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이들과의 논증은 미래를 약속하며 피해 간다. 윤 대통령이 “직무에 복귀하면 또다시 계엄을 선포할 것이라는 주장은 터무니없다”면서 “개헌과 정치 개혁 추진에 집중하겠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권력의 위기가 국가의 위기 아니다마침 국제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가 ‘2025 세계자유지수’ 보고서를 공개했다. 12·3 비상계엄을 언급하며 윤 대통령이 “한국을 드라마틱한 헌법적 위기에 빠트렸다”고 했다. 한국을 예로 들며 “전 세계 민주주의가 직면한 위협 중 하나는 선출된 지도자가 민주주의 제도를 공격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윤 대통령은 스스로 자유주의자라고 칭해 왔다. 탄핵심판 첫 변론에선 “저는 철들고 난 이후로 지금까지 자유민주주의라는 신념 하나를 확고히 가지고 살아온 사람”이라고 했다. 그가 정말 자유주의자였다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집단의 폭력을 용인하는 계엄을 떠올렸을 리가 없다. 정치적 반대파를 일거에 척결하려 하지도, 권력자의 위기와 국가 존립의 위기를 동일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가장 큰 거짓말은 그가 자유주의자라는 것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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